그 손님, 왜 우리 술값을 계산하고 갔을까

[삶이 보이는 창] 예상치 않은 호의에 드는 고민

등록 2013.05.22 18:13수정 2013.05.22 18:16
0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 92호에 실린 한은옥 님의 그림입니다. ⓒ 한은옥


오늘은 계속 미뤄오던 자질구레한 볼 일들을 하루 만에 싹 해치웠다. 종일토록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며 나와 함께 해준 활동보조인에게 고마움의 인사 표시라도 할 겸 늦은 저녁 식사를 곁들여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가끔 다니던 동네 음식점을 찾아 간단한 식사와 반주를 즐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계산을 하고 귀가할 요량으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해맑은 표정을 지으시며 음식값이 계산 되었다며 시키지도 않은 소주 한 병을 더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와 활동보조(이하 활보) 하는 동생은 황당해서 주인아주머니께 확인을 했다. 그 정황인즉, 우리 뒷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우리 몫까지 계산을 하고 이미 가버렸다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호의를 받은 우리는 좀 전에 주인아주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소주 한 병을 마저 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활보 : "짧은 생각으로는 우선 돈이 굳었으니 좋긴 한데, 이런 일이 난생 처음이라 어리둥절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 "언뜻 생각하자면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지. 너는 이런 일이 당연히 처음이겠지? 근데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들이 심심치 않게 있어. 예를 들면, 장애인의 날이면 어김없이 전철 안에서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이 천 원짜리 한 장을 던져주며 내려버리고, 한여름 장마철에 비를 맞으며 이동하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더니 자기 차를 길 한복판에 버려두고 우산을 씌워주며 집까지 데려다 주는가 하면, 어쩌다 연극 공연을 볼 때는 돈을 받고 판매하는 프로그램 북이나 시디 같은 것들을 거저 줄 때도 있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식당마다 많이 돌아다니는 껌이나 과자 같은 것을 파는 분들이 나에게는 돈도 안 받고 그냥 주시기도 해.

또 출퇴근 시간처럼 전철이 비좁을 때 타면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양 억지로 나를 휠체어 지정석에 구겨넣기도 하지. 하지만 몇 정거장 못 가서 그 많은 눈총과 사람들을 파헤치며 도착지에 내릴 때는 정말 그분의 호의를 원망할 때도 있어."


활보 : "아까 그 사람들은 우리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님 순수한 호의였을까?"

: "동정이었든 호의였든 절대 반갑지만은 않아. 난 그 사람들 얼굴조차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날 기억할 거야. 그래서 내가 농담처럼 너에게 말했지? 난 어딜 가든,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잘해야 한다고. 난 함부로 뭔 짓을 못 한다고. 그럴 때면 넌 항상 놀렸지? 누나가 무슨 연예인이냐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 자신이 기껏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 엉뚱한 곳에 있거나 안 좋은 짓을 하는 걸 보거나 알게 되면 너라면 좋겠냐?"

활보 : "그러게요. 누나가 그런 말을 할 때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핀잔을 주곤 했는데, 막상 누나와 함께 이런 상황을 겪고 보니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누나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나까지 기억할 거 아녜요."

: "그러기가 쉽지. 아! 생각해보니 이런 일들도 적지 않다. 어쩌다 친형제와 식사나 술자리를 하다 보면, "무슨 사이냐? 정말 보기가 좋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용기 있게 서로 사랑해라!"라는 황당한 말을 종종 들었어. 그래서 우리 오빠나 남동생이 너와 같은 활보와 동행하는 걸 좋아해. 남매끼리 오랜만에 밥 한 끼 먹는데 괜한 오해 사지 않아도 되니까. 그네들은 나와 연인 사이로 오해 받는 걸 굉장히 불편해 하더라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다시 부딪칠 일 없는 사람들인데도 말이야.

아무튼! 우리가 원한 바 없지만 호의를 받았고, 이왕 받은 거 좋게 받아들이자! 아까 그네들 마음이 정말 동정과 시혜였다면 우리가 이미 먹은 식사와 술값만 계산했을 거야. 하지만, 술을 한 병 더 남기고 갔으니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자."

활보 : 푸하하! 결국엔 이 소주 한 병에 동정과 호의가 갈리네요?

: "그런가? 홍홍~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까지 동정과 호의를 고민하게 했네."

나는 오늘 이 경험을 통해, 중증장애여성으로서 사람들이 건네는 손길들을 어디까지가 호의이고 또 어디까지를 동정과 시혜라 판단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새삼스레 생각해보았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최성미 님은 인천 '작은자야간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장애여성의 일과 삶에 대한 다양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삶이보이는창 #삶창 #풍경 #활동보조인 #활보
댓글

진보생활문예 출판사 삶창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아빠, 그럴 수가 없었어?"

AD

AD

AD

인기기사

  1. 1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2. 2 아름답게 끝나지 못한 '우묵배미'에서 나눈 불륜
  3. 3 '검사 탄핵' 막은 헌법재판소 결정, 분노 넘어 환멸
  4. 4 스타벅스에 텀블러 세척기? 이게 급한 게 아닙니다
  5. 5 윤 대통령 최저 지지율... 조중동도 돌아서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