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달린다, 나는야 폭주 노년!"

책 속의 노년(112) : <폭주 노년>

등록 2013.05.29 20:32수정 2013.05.2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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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건 인간의 본성인 모양이어서, 내 눈에는 고만고만한 키의 도토리로 보이는데도 호프집 옆 좌석에서는 새파란 대학생 선배가 똑같이 새파란 대학생 후배들에게 무용담 풀어놓기에 여념이 없다.

하물며 수 십년 세월 살아온 어르신들은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요즘 자서전 출간과 수필집 자비(自費) 출판이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 유유자적 인생 회고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는 생각과 말로 자신을 '80대 청년'이라 칭하는 주인공이 등장했다. 책 제목도 <폭주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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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폭주 노년> 표지 ⓒ 페이퍼로드

아무리 힘든 세월과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해도 남의 이야기에 완전히 감정이입을 하기는 어려운 법. 노년에 이른 분들이 스스로 써내려간 인생담을 생판 남인 내가 읽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한 바탕의 신세 한탄과 회고, 그리고는 결국 자기 자랑 혹은 후손들 자랑 일색이 되기 쉬우니 말이다.

신문기자 출신의 현직 번역가인 저자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격의 없는 친구들과 소주잔 앞에 놓고 욕설 섞어가며 주고 받듯 거침없는 표현은 기본이고, 전원생활을 꿈꾸며 지은 집이 경매로 날아가버린 이야기며 빈털터리로 나앉아 번역에 매달리게 된 저간의 사정, 지금의 생활과 사고방식 등을 단숨에 드러낸다. 괜히 제목에 '폭주(暴走)'가 붙은 게 아니다.

책은 <전력 질주를 위한 몸풀기><직함 없는 인생, 얼마나 좋은가><머리 하얀 짐승들의 반란><폭주하라, 인생 후반전!><죽을 힘으로 산다> 등 총 5부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소제목 몇 가지만 훑어봐도 저자의 생각을 짚어낼 수 있다.

'직함의 껍데기가 된 신사, '호적 연령'에 집착하는 사회, 억제를 미덕으로 착각하지 말자, 늙은이의 하루도 24시간이다, 은퇴한 늙은이의 냄새, 회색의 노년에서 장미색 노년으로, 나는 늙은 찐따다,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대기만성한 노인의 시대가 온다, 죽음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이 84세에도 술이 있고, 좋아하는 책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어 여전히 행복한 현역으로 사는 저자. 남보다 특출난 능력만으로 지금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한 일을 꾸준히 해내기 위해서는 능력과 함께 자기관리는 필수.


새벽 5시에 눈을 뜨면 혈압약부터 챙겨 먹고 신문을 본 후 가볍게 아침식사. 9시 쯤 일 시작해서 두 시간에 원고지 20장 분량의 번역을 하다보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다. 느지막히 점심식사를 한 후 사람들 왕래가 많은 동네 골목 산책. 돌아와서는 일을 더 하거나 책을 보거나 낮잠. 저녁 7시나 8시에 이부자리에 누워 9시 40분이면 잠든다.

이름 있는 회사에서 높은 직함을 갖고 있다 은퇴한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팔십 현역의 일과이다. 거기다가 본인이 노인이라고 해서 동년배 노인들을 위해 애써 변명해 주는 법이 없다.

옛 직장의 부하 직원들이 변함 없이 나를 떠받들어주리라는 착각, 평생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 고생했으니 이제는 모두가 나를 위해주리라는 헛된 기대, 이 사회가 나의 노고를 되새기며 어디 가든 어른 대접을 해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차 없이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제대로 잘 늙기 위해 고민하는 중장년은 물론이지만 노년세대가 읽었으면 좋겠다.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자세로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을 보내야 할 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돈 버는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차원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 인생을 대하는 나만의 관점 같은 것이다.   

그동안 여러 번역서의 표지에서 '옮긴이 김  욱'이라는 이름을 많이 발견했던 까닭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30년 생이니 나보다 딱 30년 연상, 30년 후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보너스다.    

저자가 주변의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표현 세 가지를 꼽았는데, 나는 이 '젊은' 나이에도 이런 말을 입에 올리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 것은 앞의 것보다 더 큰 보너스다.

"첫째는 나도 알 만큼 안다, 둘째는 이 나이에 뭘, 셋째는 내가 옛날에는 말이지..." 
덧붙이는 글 <폭주 노년> (김 욱 지음 / 페이퍼로드, 2013)

폭주 노년

김욱 지음,
페이퍼로드, 2013


#푹주 노년 #김욱 #노인 #노년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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