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땀으로 차린 식탁
이안수
상추는 제 이웃인 김성규 선생님께서 우리 집 몫으로 텃밭을 조성하고 직접 심어주신 것입니다. 김 선생님의 노고로 농약 한 방울 쓰지 않고 퇴비로 땅을 걸게 한 곳에서 자란 것을 저는 수확만 했을 뿐입니다.
된장과 고추장은 미생물 농사꾼인 옹기뜸골의 우태영 선생님이 거창에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콩과 물, 볕·바람·계절의 기운까지 담아 만든 것입니다.
밥은 고향의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쌀로 지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일구고, 할아버지께서 일군 그 논에서 영근 벼로 찧은 것입니다. 농부의 땀과 대지의 기운 그리고 고향의 정이 버무려진 밥이지요.
무엇보다도 상추와 콩, 쌀은 제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렇듯 은덕을 입은 밥상으로 아침을 먹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해야 이 신세를 줄일 수 있을까?
거저먹는 아침어릴 적 벼 타작하는 모습은 참 신명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협업해야 하는 일이기에 많은 사람이 마당에 모이기 때문이었지요.
탈곡이 끝나고 벼 가마니들이 높이 쌓인 모습은 어린 저에게도 부자가 된 듯 넉넉한 마음이 들게 했으니 여름 내내 땀 흘린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들떴을지…….
고향 집을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퇴락되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기만 합니다.
뒤란의 처마 아래에 두터운 먼지를 쓰고 있던 탈곡기와 도리깨, 풍구와 키, 고무래와 멍석은 40여 년에 걸쳐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마당질을 위해 단단하게 다져졌던 흙 마당도 풀을 감당할 수 없어 시멘트로 덮였습니다.
집안의 농구(農具)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시멘트 틈 사이로 풀이 돋은 그 타작마당을 거닐면서도 그 흥겨웠던 타작 날의 기억도 희미해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제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허리를 굽혀 벼 알갱이를 줍던 모습입니다.
타작이 끝나고 가마니로 모든 곡식을 갈무리한 뒤에도 판판하고 매끈한 그 마당에는 곡식을 떠는 과정에서 떨어진 알곡들이 흩어져있기 마련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알곡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주워 모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주운 그 한 움큼의 알곡을 찧어서 밥을 지으면 한두 숟가락 될 만한 양이지 싶습니다.
저는 도회지로 나와 식당 밥을 먹으면서 사람들이 남기는 밥상의 남은 밥을 볼 때마다 닭이 모이를 쪼듯 허리를 굽혀 한 알 한 알 알곡을 줍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뇌리에 더욱 선명해 졌습니다.
그 후부터 저희 아이들에게도 절대 밥을 남기지 못하도록 훈육했습니다. 숟가락을 놓은 뒤 밥 한 톨이 식기에 붙어있어도 다시 숟가락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원칙은 온 식구 모두에게 적용되어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졌습니다.
가족들이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고 저만 홀로 파주에 남게 되고부터는 제 끼니의 반은 주로 지인들과 하는 외식입니다. 그 외식에서 아무리 적당히 음식을 주문해도 남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것을 꼭 포장해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다음 끼니를 그 남은 밥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는 식사가 저의 집에서 하는 식사의 반이 됩니다.
그러니 요즘 제가 집에서 밥을 지어서 먹는 경우는 총 식사량의 4분의 1정도입니다.
오늘도 첫 식사는 어제 지인들과 한 저녁식사에서 남은 음식과 손님이 남기고 간 즉석밥 그리고 텃밭의 상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