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폭도'는 왜 사진기를 들었을까

[2013 전국투어- 광주전라⑥] '시민군' 김향득씨가 5·18 사적지를 기록하는 이유

등록 2013.06.20 16:24수정 2013.06.2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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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6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광주전라입니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 20일 오후 8시 28분]

"너무 애절해서 잊고 싶기고 하고 그 기억에서 한 발 비켜나 마음 편하게 살고도 싶었다"던 그는 33년이 지난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1980년 5월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잊고 싶었던 그의 마음 자락엔 되레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5월"이 가득차 있다. 사진을 통해 자기 나름의 5·18 역사를 기록하며 '기억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향득(51)씨. 1980년 5월 직접 시민군으로 참여한 그는 이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 5월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다.

고등학생 시민군, 5월 사진전을 열다

 1980년 5월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김향득씨는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주제로 5·18 사적지와 추모비 등을 담은 사진전을 열었다. 이 사진전은 5·18 왜곡 논란 등이 거세지면서 의미를 더했다.
1980년 5월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김향득씨는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주제로 5·18 사적지와 추모비 등을 담은 사진전을 열었다. 이 사진전은 5·18 왜곡 논란 등이 거세지면서 의미를 더했다.김향득 제공

지난 11일 <오마이뉴스>가 그를 만난 곳도 5·18 사적지 중 한 곳이다. 바로 1980년 당시 재야 인사들과 시민군의 주요 활동 근거지 중 하나인 옛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 이 곳은 김향득씨가 시민군으로 참여해 활동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어 사적지라는 사실을 알아 차리기 어려운 곳이 됐다.

그는 '5·18 역사 지우기' 논란과 왜곡이 한창이었던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광주YMCA 무진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주제로 특별한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전에선 5·18 사적지와 항쟁추모탑, 항쟁 당시 사망한 중·고·대학생들의 추모비와 순의비 등을 담은 5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 사진전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의 사진전은 5월 광주에 대한 역사 왜곡과 폄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 논란 등 5·18 역사 지우기 논란 시점과 겹치면서 의미를 더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노태우 등 12·12세력에 대한 사법적 유죄 판결과 항쟁 당사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통해 이미 '역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김향득씨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국가보훈처가 나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 공식곡으로 제창하지 않는 등 5·18을 훼손하고 나서니 북한 개입설 등 터무니 없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라면서 "'빨갱이'니 '폭도'니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사이트 등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또 이렇게 상처받고 있는 상황이 갑갑하고 화가 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역사적 현장은 물론 5월이 자꾸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김향득씨는 <오마이뉴스> 인터뷰 전날인 지난 10일,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와 5·18단체 등이 중심이 돼 활동하고 있는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이하 5·18대책위)'와 함께 상경했다. 5·18대책위는 국가보훈처와 서울 연희동 전두환의 집 앞 근처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현장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들고 시위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5·18 당시 학살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추징금도 내지 않고 있는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며 "왜 국민세금으로 그렇게 많은 경찰 병력을 동원해 전두환을 지켜주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경찰이 학살 책임자를 비호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매직펜으로 새겨진 '극렬폭도'라는 낙인  

 5·18 시민군으로 참여한 김향득씨. 그는 19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5·18 시민군에 참여해 투사회보 배포와 등사 등의 역할을 맡았다. 33년이 지난 오늘,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5·18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5·18 시민군으로 참여한 김향득씨. 그는 19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5·18 시민군에 참여해 투사회보 배포와 등사 등의 역할을 맡았다. 33년이 지난 오늘,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5·18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강성관

몸소 5월을 겪고 또 이렇게 살아내고 있는 그는 1980년 5월 27일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민군 28명과 함께 체포됐다. 거기서 시민군 3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계엄군은 매직펜으로 그의 등에 '극렬폭도(와이폭도)'라고 쓰고 오랏줄에 묶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그와 함께 김효석과 이덕준 등 당시 대동고 학생 3명도 포함돼 있있다. 김향득(당시 대동고 3년)씨는 군 영창으로 끌려가 다른 이들처럼 심한 구타와 고문을 견뎌야했다. 그는 상무대 영창에서 수사를 받으며 수사관들로부터 '볼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향득씨는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군홧발로 짓밟히는 고문을 당했고, 수사관들은 고문 도구인 볼펜을 그의 별명으로 붙여줬다. 그러던 어느날 수사관들은 수감 중이던 이들을 불러모으고는 그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단다.

그 때 그가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다. 그는 "당시에 시위를 벌이면서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와 '우리의소원은 통일'이었다"고 말했다. 4절까지 애국가를 모두 부르자, 그후 그의 별명은 '애국가'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해자들이 남긴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별명이다. 그는 "우리를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매질해 인간적인 모멸감을 들게 한 그들을 보면서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향득씨가 어린 나이에 항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세차례나 수감됐던 교사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씨 영향이 컸다. 김향득씨 등은 학교에서 독서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김씨는 당시 지역 재야 인사들이 모여 시국를 논했던 곳 중 한 곳인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 들나들었고 그러던 중 5·18을 맞아 자연스럽게 항쟁에 합류했다.

그는 체포되기 전까지 투사회보팀에 속해,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의 좁은 관리사무소에서 시내에 붙일 대자보를 쓰고 민주투사회보 등사와 배포 등을 담당했다.

"5·18은 아픈데도 기억해야하는 첫사랑 같다"

 옛 전남도청 앞 회화나무. 수령 150여년으로 알려진 이 회화나무는 1980년 당시 시민군의 참호 역할을 했다. 이 회화나무는 결국 고사 판정을 받았다. 김향득씨가 회화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옛 전남도청 앞 회화나무. 수령 150여년으로 알려진 이 회화나무는 1980년 당시 시민군의 참호 역할을 했다. 이 회화나무는 결국 고사 판정을 받았다. 김향득씨가 회화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강성관

"죽어버리고 싶었다"던 상무대 영창에서 35여 일만에 석방된 그는 대학진학을 했지만 몇 차례 입학과 자퇴, 전과를 거듭했다. 20대를 5월 단체에서 활동하며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며 보낸 그는 1992년부터 10여년 동안 은행 청원경찰 일을 했다. 일을 그만둔 2002년부터 문화재 답사를 다니며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 논란이 한창이던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5·18 사적지와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5·18 사적지에 매달릴까. 그에게 5·18은 '첫사랑' 같은 것이란다. 마음이 너무 아리고 아파서 잊어버리고 싶고 일부러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 끊임없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과 매년 1월 1일이면 항상 망월동 구묘역과 신묘역(국립5·18민주묘지)·옛 도청·전남대 앞 등 4곳에 간다. 첫눈이 내리면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듯 그렇게 희생당하신 분들을 만나러 간다. 너무 애절해서 잊고 싶기고 하고 그 기억에서 한 발 비켜나 마음 편하게도 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당시 희생당하신 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5·18의 흔적을 기록하고 그 상징성을 지키는 것이다. 역사적 장소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잘 보존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5·18 현장과 사적지는 개인적으로 사진으로 찍고 싶은 첫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의 노력은 5.18 사적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체계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지난해에는 5.18사적지에 얽힌 사연과 사건, 사진을 묶어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사적지는 5월의 현장이다, 현장은 당시의 증언이다. 이런 장소들이 자꾸 없어지는 것은 5·18정신을 희석시키는 것이다"며 "현장이 온데간데 없다면 그 역사가 살아 움직이기 힘들다. 현장이 사라지니까 자꾸 북한군 개입설이니 빨갱이 폭도니하는 터무니 없는 역사 왜곡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국민적 행동으로 5·18 왜곡 막아야"

 33년전 5월, 투사회보를 등사하고 배포했던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는 오늘도 5·18 사적지 등 5월 관련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33년전 5월, 투사회보를 등사하고 배포했던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는 오늘도 5·18 사적지 등 5월 관련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강성관

그는 지난 7년 여 동안 광주지역 5·18 사적지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도 채록해 왔다. 광주전남지역 뿐 아니라 전북과 서울 등 타 지역의 5월 사적지 작업도 진행했다.

그는 "5·18은 희생자와 유가족 등 당사자만의 것도, 광주만의 것도 아니다"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사진전에서 전북대 이세종 추모비와 서울대 5·18항쟁탑 등을 전시하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사진 기록과 함께 많은 분들의 5월을 채록하면서 울기도 많이 했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연들이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할 때가 많았다. 나에게도 힘든 과정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다."

그는 이렇게 모은 광주전남지역 5·18 사적지 사진 기록과 5월 관련 채록, 타 지역의 사적지와 투쟁 사례 등을 모아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그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종합편성채널의 5·18에 대한 악의적 역사 왜곡이 잘못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며 "깨어있는 시민들이 역사 지우기에 앞장서고 있는 국가보훈처장 사퇴,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식 공식곡 지정 등 역사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서명 활동에 직접 나서 시민의 힘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 #김향득 작가 #임을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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