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팔 또라이들"의 말, 우리가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서평] 공선옥의 장편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록 2013.06.22 10:27수정 2013.06.2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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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이야기

'정애'는 '묘자' 할머니에게서 "아조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방죽굴' 살던 '순자'는 '흥으으으으으'나 '뀍뀍뀍' 하고 울기만 했다. 그녀는 반은 실성했다. 산사람들(한국 전쟁 중의 빨치산)에게 깡냉이 몇 알 줬다는 이유로 처형당하는 아버지 곁에서 튀는 피로 피칠갑이 된 뒤부터였다. 가난한 '종택이'가 순자를 색시로 맞았다.


순자는 "달구 새끼맹이로 사람은 모자래도 새끼는 퐁퐁 잘"(57쪽) 낳았다. 정애, 순애, 명애, 영기까지 잘 낳았다. 그러나 마지막 두 쌍둥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 사이에 딸 순애가 죽었다. 남편 종택이도 동네 이발소 앞에서 이발소 '박샌'이 휘두른 칼끝에 죽임을 당했다. 큰딸 정애는 동네 사람들의 압박으로 동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정애는 남은 동생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다.

'도시(광주)'로 나온 정애는 시장에서 콩나물을 팔아 동생들을 먹였다. 그러다 그 해 5월, 이제는 군인들이 정애를 짓밟았다. "5391부대 마해진"이라는 이름의 군인이 가까스로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혼이 나간 뒤였다. '정애'처럼, 아무 죄 없이 살다가 도시로 내몰린 '새정지' 마을의 단짝 친구 '묘자'가 가끔 찾아와 그녀를 챙겨 주었다.

정애를 다시 만나기 전, 묘자는 '박용재'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박용재는 5월 그날, 일터인 '동아카센터'에서 일을 마치고, 묘자 엄마가 꾸려가던 돼지국밥집 '복래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신 후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일단의 공수부대를 만"(85쪽)났다. 그가 복래식당으로 다시 온 것은 8개월 후였다. 그때 묘자는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그는 점점 '짐승'이 되어갔다. 어느날 묘자는 그를 목졸라 죽였다. 감옥에 갔다.

정애는 다시 '새정지'로 갔다. '즘생'만도 못한 그곳 '사람' 몇이, 이장 '박샌'과 도정공장 공장장 '오샌'이 그녀를 다시 짓밟았다. 그러다가 정애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혼불'처럼 조용히 사라져갔다.

정애 가족과 그녀의 친구 묘자에게 닥친 비극의 밑자리에는 '국가'와 '마을'이라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정애 가족과 같은 약자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은, 가장이 없는 정애네 식구들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집안의 희망이던 돼지와 닭을 강탈해 갔고, 아직 어리고 여린 정애와 순애의 몸을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애 고아가 된 정애와 그 동생들을 향해 "에미 애비가 없어서 행실이 나빠도 누가 잡아줄 사람이 없다. 벌써부터 남자하고 그런 짓을 한다. 이대로 살게 뒀다간 동네 망조 난다."(74쪽) 하는 말들을 수군거리며 쫓아내다시피 했다. 그들은 부모와 동생들을 잃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정애에게 "즘생이나 한가지"(73)라고 말했다.

맞다. 정애는 '즘생'이었다. 정애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즘생'처럼 몸부림쳤다. 살아남기 위해 돈을 훔치고 몰래 닭을 잡아 먹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애네를 유린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비뚤어진 욕망을 따라 여린 순애과 정애를 겁탈하고, 천애고아가 된 정애네 삼남매를 동네에서 쫓아냈다.


그때 그들은 '즘생'만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정애와 그 동생들이 살던 그 '새정지'는 정확하게 라스 폰 트리에가 서늘하게 묘사한 바로 그 '개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도그빌(Dogville)'이었다.

#2. '지금' 이야기

지금, 광주는 침묵하고 있다. 말을 다 해서가 아니다. 할 말이, 응어리진 피를 토하듯 꾸역꾸역 게워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말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도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는, 그곳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말 못하는 "지렁이만 할 말 많은 밤"을, "지렁이들만 할 말 다 하는"(239쪽)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죄 없이 살았지만 가장 많이 벌을 받"(246쪽)은 '정애'와 '묘자'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새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섭다. 모든 새것들은 다 무서운 것이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는.(137~138쪽)

'옛날' 이야기 속에서 묘자가 한 말이다. '공돌이' 박용재가, 광주 상무대 영창과 삼청 교육대를 거쳐 '8개월' 후에 카센터로 왔을 때 사장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야 자네 같은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허지. 여기 사람들치고 안 그렇게 생각허는 사람은 없을 거여. 허나, 어쩌겄는가. 마음은 아니어도 현실이 그런디.(84쪽)

카센터 끝 개천가 위 다리 난간에 하루종일 서 있는 박용재를 향해 사람들은 또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오일팔 또라이들이여, 쟈들이. 깡깡깡. 시내 가봐, 순 저런 애들이 길 가상에 앉아서 비 구경허는 중들 모냥으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쳐다보고 있더라고. 치지직치지직. 누군들 속 편하겠는가마는, 헐 수 없는 일이제. 쓔쓔쓔쓔.(89쪽)

광주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돼버린 것일까.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새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아니어도"라며 '현실'을 핑계 삼고, "헐 수 없는 일"라고 지레 손을 털고 마는, 평범한 우리들 소시민이 싫어하는 그 '옛날' 말이다.

우리는 1980년 5월에 흘린 광주의 피가 1987년의 6월 민주화 항쟁을 낳았음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고,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던 사회를 가져온 것도 1980년의 광주였다. '빨갱이 수괴'라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아는 것이라곤 '돈'밖에 모르던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도 광주 덕분인지 모른다. 광주의 피가 있었기에 세상은 민주주의 천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배 부르고 등 따뜻하게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 이것들만으로, 우리는 1980년의 광주를 지난 역사 속에 묻어둘 수 있을까. '새것'이 아닌 '옛날' 이야기라며 광주를 향해 손사래를 칠 수 있을까. 내게는, 평범한 회사원과 대학생들이 '일베충'(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의 회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여 이르는 말)이 되어 광주와 호남 사람들을 '홍어'로 비하하는 일이 매우 징후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한국현대사학회를 중심으로 한 극우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이, 자신들이 쓴 역사 교과서를 펄럭이며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이 두렵기만 하다. 그들에게 역사는, 그리고 광주는 현재형이다. 뒤집어엎어야 할 배반의 역사다.

그런데 '그들'이 아닌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과연 그들처럼 역사를, 광주를 현재형으로 생각할까. 나는 이 책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이 질문에 대한 작가 공선옥의 대답으로 보고 읽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 허술한 글을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노래하고 혼자 울었던 내 어머니에게 바친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들어주는 사람 없어 혼자 울어야 했던 광주에 바친다.(262쪽, '작가의 말' 중에서)

지금 침묵하는 광주는 아직 할 말이 많고, 우리는 그 광주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유가 있다.

영암집 숙자가 죽은 사람은 있어도 죽인 사람은 없는 야속한 세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산 사람들은 사는 것에 바빠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들이 언제 죽었냐 하고서 잊어버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도 그 사람이 누구를 죽였든지 말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시치미 뚝 떼는 세상이라고. 이놈의 세상이 그렇게도 야속하고 무정하다고.(165~166쪽)

찔레꽃 향기로웠을 그 봄날, 수없이 많은 애먼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많은 "오일팔 또라이들"을 만든 뒤 권좌에 오른 이는, 지금 '29만1천 원'으로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한복판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대한민국 경찰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광주를 향한 우리의 침묵은 죄다. 우리가 계속 '옛날'을 핑계로 광주에 침묵한다면, 광주는 정녕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사는 이 나라 대한민국은, 곤경에 처한 '그레이스'를 능멸하고 겁탈하는 인정 많은 사과장수나, 도덕적 허영 속에서 점잖고 순수한 척했던 '톰'이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도그빌'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씀, 창비 펴냄, 2013년 4월, 264쪽, 1만3000원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창비, 2013


#공선옥 장편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광주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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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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