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의사 기념관문경시
김수종
사상적 동지로 만나 옥중 결혼을 했던 가네코는 몇 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박열은 일본의 항복 직후인 45년 10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풀려날 당시 그는 세계 최장기수에 양심수로 22년 2개월 복역기록을 세웠다.
박열은 해방 후 잠시 김구 선생과 뜻을 같이 하기도 했지만 이내 의절했다. 이후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이승만과 만났다. 그 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는 민단 단장직을 수행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1950년 한국전 개전 직후 납북되었다.
북에서 구체적인 활동 자료는 알 수 없으나 북 정권에 일부 기여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는 박열 의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박열의 첫 부인이었던 가네코는 젊은 나이 옥사했지만, 열렬한 아나키스트로 남편의 고향인 문경에 묘소가 있는 일본인이다.
1903년 1월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으로 양친 모두 양육을 거부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