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의 동거 서약, 대단하네요

[김수종 문경을 걷다 10] 박열 의사 기념관

등록 2013.06.26 18:08수정 2013.06.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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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부터 이번 문경 여행의 가장 큰 목적지 중에 하나인, 마성면 오천리(샘골)에 지난 2012년 10월 개관한 '박열(朴烈) 의사 기념관'으로 갔다. 좁은 농로를 따라 가는 길이 보통은 아니다. 이런 곳에 기념관을 세운 이유가 약간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은 협소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박열 의사,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본명은 준식(準植)으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아나키스트다. 선대가 예천 금당실 출신으로 문경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2년 점촌 모전동에서 태어났다. 학교는 인근 상주군 함창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학과에서 수학했다.


박열 의사 문경시
박열 의사문경시 김수종

재학 중 민족주의 색채를 가져 3·1 만세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이후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를 고학으로 다녔다.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후 '의열단' '흑우회' 등을 조직하기도 했다. '흑도회'에서 본격적인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했다.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통하여 직접행동의 기회를 노리던 중, 그 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일왕 다이쇼와 히로히토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의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과장·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박열과 가네코는 암살기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박 의사는 1926년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이 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과장·조작된 사건이라 그런지 이내 두 사람은 며칠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 문경시
박열 의사 기념관문경시김수종

사상적 동지로 만나 옥중 결혼을 했던 가네코는 몇 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박열은 일본의 항복 직후인 45년 10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풀려날 당시 그는 세계 최장기수에 양심수로 22년 2개월 복역기록을 세웠다. 

박열은 해방 후 잠시 김구 선생과 뜻을 같이 하기도 했지만 이내 의절했다. 이후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이승만과 만났다. 그 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는 민단 단장직을 수행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1950년 한국전 개전 직후 납북되었다.

북에서 구체적인 활동 자료는 알 수 없으나 북 정권에 일부 기여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는 박열 의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박열의 첫 부인이었던 가네코는 젊은 나이 옥사했지만, 열렬한 아나키스트로 남편의 고향인 문경에 묘소가 있는 일본인이다. 

1903년 1월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으로 양친 모두 양육을 거부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가네코 여사 문경시
가네코 여사문경시김수종

일본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에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살고 있던 고모 집에서 약 7년간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했다. 청주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게 되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모친이 자신을 술집에 팔아넘기려 하자 혼자 동경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배달,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1년에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동지로 만나 동거를 시작했으며,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그와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당시 박열과의 동거 서약을 보면 대단하다. '첫째, 동지로서 동거한다. 둘째,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셋째,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라고 되어있다.

박열 기념관
박열기념관김수종

1923년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는데, 그 해 가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다.

며칠 만에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박열의 고향인 문경 땅에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분봉도 묘비 석도 없는 산소를 마련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받아 문경읍 팔영리에 안장했다. 현재 가네코의 무덤은 박열 의사 기념관 입구로 2003년 이장되어 자리를 잡았다.

당시 박열과 동지가 된 이유를 적은 형무소의 진술서에 그녀는 "나는 박열에게 부화뇌동하여 천황이나 황태자를 타도하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천황은 필요 없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이 박열과 같았기 때문에 부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조건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공동으로 실행하려는 동지적 결합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천대받던 식민지 남성을 사랑하고 존경한 일본인 여성으로 남편보다 더 강렬한 항일 감정을 보이며 천황제를 부정하고 온몸으로 항일운동을 한 전사였던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에서는 그녀의 전기가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야마다 쇼지가 저술한 책이 출간되었으며, 그녀를 연구하는 학술모임도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KBS스페셜에서 가네코와 박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박열의 부인 무덤 문경시 마성면
박열의 부인 무덤문경시 마성면김수종

박열 의사 기념관 입구 왼쪽에는 가네코 여사의 산소가 있다. 나는 이곳에서 간단하게 묵념을 했다. 얼마 전 내가 문경에 간다고 하니 후배인 혜복이가 꼭 가네코 여사의 무덤을 참배하라고 부탁을 해서 그녀의 기원도 같이 올렸다. 그리고 입구 우측에 있는 생가를 살펴보았다. 작고 아담한 초가집이었지만, 정취가 있어 보기에 무척 좋았다.

다시 조금 올라 기념관은 2층 건물로 웅장해 보였다. 57억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서 7~8년 정도 공사하여 2013년 10월에 완공했다. 어떻게 보면 이곳이 바로 한국 아나키스트의 성지가 된 것이다.
#박열 의사 #문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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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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