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시민이여, 진실의 눈을 크게 떠라

[주장] 진실과 준법, 두 가지 기준이 시시비비의 핵심

등록 2013.06.29 14:48수정 2013.06.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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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오늘(6월 29일)은 '전 재산 29만원으로 잘 살기의 달인' 전두환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은 역사적인 날이다. 1972년에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도록 했으니 198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경험을 몇 차례 할 수 있었다. 각자의 기대나 바람과 견주어 볼 때 다행스럽거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교차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중요한 점은 국민 모두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고, 또 그 모두는 다수의 선택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작년 말에도 우리는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선거일을 그리 오래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 두 후보가 잇달아 사퇴를 함에 따라 오랜만에 주요 후보 두 명이 박빙의 승부를 펼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광장이나 체육관에서 무대 위의 누군가가 일장연설을 하면 청중은 박수 치고 환호하는 모습이 흔히 볼 수 있는 선거 유세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공간의 중심이 점점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고 있는 듯하다. 선거철이 되면 평소에 조용하던 사람들도 정치에 대해 한 번쯤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이면 나름의 정견으로 열띤 토론을 펼치기도 한다. 학생이든 주부든 공무원이든 교사든 군인이든 회사원이든 다 마찬가지다. 뭐 각자가 각자의 시비지심에 근거해 다양한 의견을 활발히 펼치는 건 국민 대다수가 정치에 무관심한 상황과 비교한다면 마땅히 권장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선거에서 한 사람이 한 표만을 행사할 수 있듯이 선거에 대한 의견 공유의 광장에서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목소리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복제인간을 만들지 않고서야 내가 가진 생각은 내 이름과 내 얼굴, 내 목소리로 나 한 사람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물론 돈으로 사람을 사거나 억지로 청중을 동원해서 내 얘기에 기계적으로 동조하고 환호하게 하는 등 내 주장의 확산력과 정당성에 떳떳하지 않은 방법으로 힘을 보태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여기선 논외로 하자.

문제는 온라인이다. 상식적으로는 한 사람이 하나의 사이트에서 하나의 아이디만을 사용할 수 있다. 진보든 보수든 아고라든 일베든 그건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다. 아무리 내 눈과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한다 한들 그게 그 개인의 신념이고 생각이면 읽고 듣기 싫을지는 몰라도 그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야 한다. 적어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이다. 너무너무 내 얘기가 하고 싶어서 엄마나 동생의 아이디를 몰래 알아내거나 만들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결코 상식적인 행동은 아닐 테지만.

국정원 직원이라고 해서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 없지는 않을 테고 개인 자격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그 견해를 밝히는 일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앞둔 시기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통령 직속기관의 조직원이 타인의 개인 정보를 도용해 수없이 많은 아이디를 만들고 은밀히 마련한 별도의 공간에서 근무 시간에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사태의 본질이다. 과연 이게 개인의 충정으로 가능한 일일까? 조직의 상사 한두 사람이 지시하거나 눈감아줘서 할 수 있는 일일까?


오프라인 선거 유세에서 돈으로 청중을 동원하는 일은 불법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동원해도 법을 어기는 것인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동원(?)한 것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그것도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부하기 힘든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라면? 그 지시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지 않을까? 대통령 직속기관이 나라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큰일을 대통령의 지시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꾸몄다면 지휘체계의 문제일 것이고 지시 받은 대로 움직였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이번 사태를 일컬어 어떤 언론은 "정치 개입"이라 하고 어떤 언론은 "선거 개입"이라 한다. 선거도 정치행위의 일종이니 "정치 개입"이 "선거 개입"을 포함하는 더 큰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폭행'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특히 '성폭행'을 단순한 '폭행'과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성폭행'도 폭행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일이겠지만 특별히 '성폭행'이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데는 우리가 이 두 단어를 통해 받는 느낌이 크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국정원 여직원이 방안에서 한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은 (또는 못한) 일에 대해서 당시의 박 후보는 성폭행범이나 쓰는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했다는 식의 표현을 했다. 당시의 현장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그곳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카메라가 부서지는 폭행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상대편을 더 큰 가해자라고 손가락질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얼렁뚱땅 경찰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진실의 힘이 당시에 크게 작용하지 못한 데에는 모르긴 몰라도 사실과 상관없이 "성폭행범"이라는 표현이 크게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개념 짓는가 또 이를 다양한 언론들이 어떻게 다시 표현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건이나 상황의 전개와 결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가 국민 대다수에게 폭넓은 개념의 정치 개입으로 해석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선거 개입으로 받아들여 질 것인가가 이 사태의 전개와 결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혹시라도 둘 사이의 구분이 좀 어렵다면 누가 "정치 개입"이란 표현을 쓰고 누가 "선거 개입"이란 표현을 쓰는지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이 평소에 가진 시각과 진실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면 이번 싸움이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 될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시각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난 늘 그랬듯이 이번에는 제발 진정한 '진실'과 '거짓', '준법'과 '불법'의 싸움이 되길 기대한다.

다시 말해 도대체 이 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으며 그 목적과 배경,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일이 법의 테두리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법을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어기고 행한 일인가? 크게 이 두 가지만 살펴보면 일반인의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왜 진실이 항상 승리하지 못하고 그럴 듯하게 꾸며놓은 교활한 거짓에게 종종 패배하고 마는 걸까? 문제는 게으름이다. 현대민주사회시민의 게으름, 그것이 문제다. 물론 하루하루의 생활과 생계에 쫓기는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려서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대의민주주의고 언론이다. 시민의 심부름꾼인 정치인이 다수의 시민의 뜻을 존중해 의사결정을 하고 정책이나 법안을 만들어 이를 잘 시행하도록 하며, 언론이 이를 잘 감시하는 일을 바쁜 시민들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정치적 권리를 얻기 위해 지난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을 하나하나 직접 알아보려 애쓸 수는 없어도 최소한 우리의 심부름꾼인 정치인이나 언론이 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진실과 법에 기반해서 판단하고 표현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정도는 살펴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야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저 "그렇다니까 그렇겠지" 따위의 게으른 생각과 판단은 피로 지켜온 우리의 권리가 누군가에게 짓밟히도록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스로 진실을 확인할 자신이나 역량, 의지가 없으면 차라리 자신의 발언권과 투표권을 포기하는 게 다수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국정원 #선거개입 #정치개입 #진실 #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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