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물로 지정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관련 회의록과 녹음기록물 등 자료 일체의 열람·공개를 국가기록원에 요구하는 자료제출요구안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재석의원 276명 가운데 찬성 257명, 반대 17명, 기권 2명으로 통과되고 있다. 사진은 본회의장 전광판에 표시된 찬반 의원명단.
남소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단다. 국회가 국가기밀이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녹음자료 등 일체의 관련 자료들을 공개하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열람하거나 제출을 요구한 후 이것을 면책특권이 허용되는 국회 회의를 통해 공개한다는 내용이다.
정상회담이 정쟁의 대상이 돼 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형사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면책특권을 이용해 국회 회의에서 공개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은 권력으로부터 국회의원의 독립적인 감시와 견제 기능을 보장하기 위해서 만든 내용인데 불법인 줄 알면서 이를 피하는 방편으로 면책특권을 남용하는 것은 법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굳이 남과 북이라는 특수관계를 들지 않더라도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정상회담을 공개하는 나라는 없다. 국가 정상간의 회담록이 공개되는 마당에 총리급 회담이나 장관급 회담이니 하는 것들을 무슨 명분으로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당 대표간의 회담은 또 어떻게 비공개로 할 수 있겠는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코미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기준대로라면 공개가 필요한 자료는 더 있다. 독도 주권과 위안부 청구권 포기를 합의해 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관련 회담록이 바로 그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며, 1977년 영해법을 만들면서 독도를 제외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의혹이 제기될만한 내용이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한일국교정상화 회담록을 공개할 수 있을까.
두번째는 5공 군사정권 시절 1983년 11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 시의 한미정상회담록이다.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이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의 정권 승인을 받기 위하여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약속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새누리당은 5공 군사정권 시대인 1983년 한미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할 수 있을까.
세 번째는 2008년 전국적인 촛불시위를 불러왔던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한미정상회담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 정상회담에서 BBK 김경준 소환과 미 쇠고기 수입을 빅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일본 총리와의 2008년 정상회담록이다. 이 회담 후 일부 언론에 "이 대통령이 (독도 문제는)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발언한 내용이 소개돼 독도를 일본에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정했지만, 이 발언에 대한 진위 여부는 당시 한일정상회담록을 공개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새누리당은 한일정상회담록도 공개하자고 국회에서 의결할 수 있을까.
정상회담은 아니지만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가 평양을 방문하여 가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록도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목록에 들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보낸 특별기를 타고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와 북의 체제 선전용인 주체사상탑을 방문했다.
지금 새누리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들이대는 잣대를 적용하면 박 대통령이 북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만경대와 주체사상탑을 방문한 것 자체가 김정일 위원장의 비위 맞추기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영빈관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과 비공개회담도 있었는데, 후에 면담 성과를 자랑하면서 박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솔직하다",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 등 시종 우호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길래 이런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위에 제시한 회담록들을 당장 공개할 수 없다면 2007년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록을 공개한 것 역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대통령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중국을 국빈 방문하기 전인 6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 서한에 답변 형식으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한 입장 표명 요구에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라고 밝혀 사후 처리 역시 자신의 몫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등은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이승만 정권 시기의 3.15 부정선거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조선대 교수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표명과 민주당의 대정부 투쟁을 주문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학생, 교수, 농민, 종교계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시국선언의 공통적 내용이 국정원 개혁(해체)와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사과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