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앙가라 강변의 연인들.
예주연
S는 내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서양 남자들에 대해 품어왔던, 니것 내것 구분이 확실한 차가운 사람일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자신의 소유물, 시간, 추억과 미래계획, 콤플렉스까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출근을 하고 나서도 혼자 남아 있을 나를 위해 매일 점심시간에 30분 거리를 운전해 집에 들러 요리를 해주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따라 독일에서 정착할 때를 대비해 독일에서의 내 커리어와 나만의 생활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싸울 때만은 너무나 달라졌다. 자신은 자유인으로 내가 아무리 애써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툼이란 게 누구의 일방적 잘못이 아니라면 어떤 이론이나 행동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일 테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은 옳고 바뀔 의향이 없다고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다툼을 진행하는 것은 그를 상처 입히고 패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나 사상 뒤에 숨은 뜻을 알고 싶어서였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에게 그렇게 이해받고 싶었다. 이런 모든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건설적 논의도 차단한 채 "나는 이런 사람이니깐, 싫으면 떠나든지"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커다란 벽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차근차근 말해도 그가 듣지 않으면 감정은 격해지기 마련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논쟁하는 것도 버거웠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을 한다거나 고함을 지르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거기까지 오게 된 과정은 무시한 채 내가 가만히 있다 그러는 것처럼 나를 히스테리 환자로 몰았다.
나는 히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성차별적이라고 느낀다. '자궁'이라는 어원을 가진 이 말은 남성들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여성들에게 일괄적으로 붙이곤 했던 병명이다. 자궁에 이상이 생겨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히스테리와 자궁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밝혀진 사실이다. 거기다 감정적 행동은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유일하게 자신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항상 이성을 유지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는 것일까.
남성은 사랑에 있어서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예술 속 사랑과 죽음을 연구한 김동규는 <멜랑콜리 미학>에서 서양 남성의 자기 사랑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남성적 사랑에 뿌리내린 자유는 복종을 금기시한다. 복종은 자유의 반대이고 자유의 적대자이자 자유의 포기이며, 치욕이고 굴종이다. 복종하는 것은 노예의 증표인 반면, 복종시키는 것이 자유인의 표지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연인을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남성적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은 위험천만하고 미친 짓이다.이 근거에는 타인보다도 소중한 '나'가 있는데 김동규는 근대 서양의 이런 '나' 강조도 허상이라고 한다.
불교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는 무아론이다. '나'는 가상이고 환상이며 덧없는 그림자다. 영겁의 회귀 속에 잠시 머무는 자리가 '나'라는 환상의 자리다. (중략) 사회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타인 또는 사회의 시선이 '나'를 형성한다고 보고 있으며, 유전학자들에 따르면 '나'는 단지 유전인자들의 운반 도구일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와 칸트로 대변되는 근대 서구인들처럼 지나치게 '나'에 집착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사랑은 모든 게 뒤바뀌는 경험이다. 자신과 다른 또 하나의 소우주를 만나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맞춰나가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그가 편한 시간에 맞춰 그를 만나러 유럽에 가면서도, 싸울 때마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를 대신해 매번 먼저 사과하면서도,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하면서도 나는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S는 자신의 세계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은 함께 해야 하는 것... 이제 '마법'에서 깨어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