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의 황홀감에 홀려 전선을 탈출하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19) #6. 탈출(1) ①

등록 2013.07.29 09:29수정 2013.07.2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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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평화롭던 낙동강 강마을 풍경.
한국전쟁 당시 평화롭던 낙동강 강마을 풍경.NARA

#6. 탈출(1)

사과서리


준기는 간이 야전병동에서 위생병 순희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나자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다행히 복부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순희가 소독을 잘하고 상처를 정성껏 꿰맸기에 별다른 후유증도 없었다. 준기가 배에 봉합수술을 한 지 아흐레 지난 날 순희는  상처의 봉합 실밥을 모두 뽑았다. 다시 사흘이 지난 밤, 순희는 준기가 있는 간이 야전병동으로 찾아왔다.

"김 동무, 이제 걸을 만하오?"
"기럼요, 이젠 살가시오(살겠어요). 최 동무가 잘 꿰멘 덕분에 상처가 잘 아물었습네다."

"그럼, 우리 오늘밤 운동 삼아 사과서리 갑시다."
"머이오(뭐요), 갑다기(갑자기) 웬 사과서리?"

순희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나작하게 말했다.

"쉿, 오늘 따라 갑자기 사과가 먹고 싶네요."


준기는 앞뒤 생각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기럽세다(그럽시다). 나두 올해는 햇사과를 입때껏 먹어보디 못해시우."
"요즘 낙동강 갯밭의 조생종 사과는 한창 제철로 맛이 들었을 거예요. 전쟁 중이라 사과 임자도 없고요."


"기래요? 기럼, 갑세다."

준기는 갑작스러운 순희의 제의에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선뜻 응했다. 그즈음 준기로서는 순희 말이라면 지옥행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제는 복부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기 때문이다. 밤이 꽤 깊었는데도 그때까지 그믐께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두 낙동강 사과 맛 좀 보여주라요."

옆자리에 누워 있던 윤성오 상등병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럼요, 우리만 먹고 오지는 않겠어요."

순희가 찔끔 놀라며 대꾸했다.

"기럼, 잘들 다녀 오우."

독전대 초소

그들은 성곡리 윗말 간이 야전병동을 나섰다. 거기에서 낙동강까지는 4킬로미터 정도였다. 그 즈음 낙동강 갯밭은 사과 주생산단지로 사과밭이 많았다. 그들은 어둑한 산길을 괭이마냥 살금살금 내려갔다. 성곡리 들머리에 독전대 초소가 있었다.

"정지! 손들엇!

순희와 준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누구야?"
"최순희 전사예요."

최순희는 아주 태연하게 대답하곤 손을 내렸다. 준기도 따라 내렸다.

"어? 최 동무, 이 밤에 어딜 가오?"
"사과서리 가요."

"뭬라구(뭐라고)?"
"김준기 동무랑 사과서리 가요."

"이 동무들이 도대체 정신이 있간."
"남 동무, 잠깐 눈 한번 질끈 감아 주세요. 어디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가 있어야지요. 돌아올 때 사과 몇 알 갖다드릴 테니. 며칠 전에 보급투쟁 가면서 맛이 잘 든 것 봐 둔 게 있어요."

평북 정주 출신의 남진수 중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날래 다녀 오라우. 야간에는 거 누구를 막론하구 통행금지인데, 내레 최 동무니까 특벨히(특별히) 봐 주는 거야요."
"고맙습니다."

그들은 초소를 무사히 통과했다. 한 십분 말없이 걷다가 준기가 순희에게 물었다.

"이 밤둥에 독전대가 초소를 통과시켜 주다니 이거 어드러케 된 일이야요?"
"지난 번 전투에서 남 중사 허벅지에 박힌 수류탄 파편을 내가 꺼내줬지요."

순희가 소곤거렸다. 그때부터는 준기가 앞서고 순희가 뒤따랐다.

 산목련(설악산, 2008. 5. 22.)
산목련(설악산, 2008. 5. 22.)박도

첫 키스

"우리 먼저 낙동강으로 가요."
"머이, 낙동강? 이 시간에 멕을 감자는 말이야요?"

"아니에요."
"기럼?"

순희의 말에 준기는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이 밤중에 낙동강으로 가자니…. 준기는 뭔가 예감이 이상했다. 몇 발자국을 옮겼다. 성곡리 아랫마을과도 멀찍한 호젓한 컴컴한 들길이었다.

"김 동무, 우리 예서 잠깐 쉬었다가 갑시다. 김 동무 걸음이 빨라 힘들구먼요."
"알가시우."

뒤따르던 순희가 앞선 준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컴컴한 들길 옆 풀밭에 앉았다. 순희는 곧 준기의 가슴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최 동무! 이러면 군기 위반인데…."
"언젠가 내가 한 말인데…. 우리는 인민 전사 이전에 이팔 청춘남녀예요."

"메라구?"
"우리는 감정을 가진 꽃다운 남녀라구요."

"언젠가는 동무를 사랑한다는 말에두 군기문란 죄로 넘기겠다고 하구선…."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머이?"
"우리 유학산에서 이대로 죽을 순 없어요."

"메라구?"
"……."
"……."

순희가 와락 준기를 껴안고 입술을 더듬었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순희의 입술이 잘 익은 오디 맛 같기도, 산딸기 맛 같기도 했다. 순희의 뜻하지 않은 입맞춤에 준기는 숨이 막히듯 황홀했다. 그 긴 키스가 끝나자 순희는 준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우리 이 죽음의 계곡을 벗어나 각자 집으로 가요."
"머이! 우리가 이대로 이 전선에서 도망가자는 말이우?"

순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수로에 머리를 박은 채 죽은 어느 인민군 전사(경북 영덕,1950. 7. 29.).
수로에 머리를 박은 채 죽은 어느 인민군 전사(경북 영덕,1950. 7. 29.). NARA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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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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