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평화롭던 낙동강 강마을 풍경.
NARA
#6. 탈출(1)사과서리
준기는 간이 야전병동에서 위생병 순희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나자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다행히 복부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순희가 소독을 잘하고 상처를 정성껏 꿰맸기에 별다른 후유증도 없었다. 준기가 배에 봉합수술을 한 지 아흐레 지난 날 순희는 상처의 봉합 실밥을 모두 뽑았다. 다시 사흘이 지난 밤, 순희는 준기가 있는 간이 야전병동으로 찾아왔다.
"김 동무, 이제 걸을 만하오?""기럼요, 이젠 살가시오(살겠어요). 최 동무가 잘 꿰멘 덕분에 상처가 잘 아물었습네다.""그럼, 우리 오늘밤 운동 삼아 사과서리 갑시다.""머이오(뭐요), 갑다기(갑자기) 웬 사과서리?"순희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나작하게 말했다.
"쉿, 오늘 따라 갑자기 사과가 먹고 싶네요." 준기는 앞뒤 생각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기럽세다(그럽시다). 나두 올해는 햇사과를 입때껏 먹어보디 못해시우.""요즘 낙동강 갯밭의 조생종 사과는 한창 제철로 맛이 들었을 거예요. 전쟁 중이라 사과 임자도 없고요."
"기래요? 기럼, 갑세다."준기는 갑작스러운 순희의 제의에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선뜻 응했다. 그즈음 준기로서는 순희 말이라면 지옥행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제는 복부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기 때문이다. 밤이 꽤 깊었는데도 그때까지 그믐께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두 낙동강 사과 맛 좀 보여주라요."옆자리에 누워 있던 윤성오 상등병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럼요, 우리만 먹고 오지는 않겠어요."순희가 찔끔 놀라며 대꾸했다.
"기럼, 잘들 다녀 오우."독전대 초소그들은 성곡리 윗말 간이 야전병동을 나섰다. 거기에서 낙동강까지는 4킬로미터 정도였다. 그 즈음 낙동강 갯밭은 사과 주생산단지로 사과밭이 많았다. 그들은 어둑한 산길을 괭이마냥 살금살금 내려갔다. 성곡리 들머리에 독전대 초소가 있었다.
"정지! 손들엇!순희와 준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누구야?""최순희 전사예요."최순희는 아주 태연하게 대답하곤 손을 내렸다. 준기도 따라 내렸다.
"어? 최 동무, 이 밤에 어딜 가오?""사과서리 가요.""뭬라구(뭐라고)?""김준기 동무랑 사과서리 가요.""이 동무들이 도대체 정신이 있간.""남 동무, 잠깐 눈 한번 질끈 감아 주세요. 어디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가 있어야지요. 돌아올 때 사과 몇 알 갖다드릴 테니. 며칠 전에 보급투쟁 가면서 맛이 잘 든 것 봐 둔 게 있어요."평북 정주 출신의 남진수 중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날래 다녀 오라우. 야간에는 거 누구를 막론하구 통행금지인데, 내레 최 동무니까 특벨히(특별히) 봐 주는 거야요." "고맙습니다."그들은 초소를 무사히 통과했다. 한 십분 말없이 걷다가 준기가 순희에게 물었다.
"이 밤둥에 독전대가 초소를 통과시켜 주다니 이거 어드러케 된 일이야요?""지난 번 전투에서 남 중사 허벅지에 박힌 수류탄 파편을 내가 꺼내줬지요."순희가 소곤거렸다. 그때부터는 준기가 앞서고 순희가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