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골짜기에서 구더기 밥이 될 수는 없잖아요"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20) #6. 탈출(1) ②

등록 2013.07.31 09:18수정 2013.07.3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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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 전투기의 공습 중인 낙동강 전선(1950. 8. 18.).

미 전투기의 공습 중인 낙동강 전선(1950. 8. 18.). ⓒ NARA


"우리 같이 도망가요"

"준기 동무, 우리 같이 도망가요."


준기는 순희의 말에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순희 동무, 요기(여기)를 탈출하자는 말이야요?"
"네, 그래요."
"…."

준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문득 고향 집을 떠날 때 아버지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라."
"꼭 살아 돌아오라야."

준기는 부모님 그 말씀이 환청처럼 들렸다. 순희는 잠자코 준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준기는 순간 바쁘게 주판알을 튀겼다. 어느 것이 부모님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를. 근데 준기에게 순희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그가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
"독전대가 알문 총살감이야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더 이상 이 전선에서 견딜 수가 없어요. 미제 놈들의 쌕쌕이 소리도 미칠 것만 같고, 총소리, 폭탄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도 이젠 지겨워요. 의약품도 없는 부상병 치료에도 아주 진력이 났어요. 나는 살고 싶어요. 여기로 온 인민의용군 전사들 가운데 이미 반 이상은 죽어갔어요. 그동안 우린 용케 살아났지만 이제 곧 우리 차례가 올 거야요. 이 길로 도망가요."
"…."
"왜, 무서우세요?"
"무섭기보다 내레 조국을 배신한 것 같아서…."
"참호 속 기관총을 붙들고 죽은 전사들을 보셨지요. 그건 인권유린이에요. 작전상 불리하면 후퇴할 수도 있는 거지요."
"…."
"그리고 조국해방도 그래요. 강대국들이 그어놓은 38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대화로 해결해야지요. 그게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는 것은 무모한 발상으로, 이번 전쟁은 서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에요. 양측 뒤편에는 미소 두 강대국이 버티기 있기 때문이에요. 설사 이 전쟁을 무기의 힘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무력 보복으로 편안한 날이 없을 거예요. 더욱이 이번 전쟁은 인민을 한낱 총알받이로 여기는 대단히 무모한 전쟁이에요."
"인권 유린? 무모한 전쟁?" 

a  미 폭격기가 인민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1951. 10. 18.).

미 폭격기가 인민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1951. 10. 18.). ⓒ NARA


"준기 동무를 살리고 싶었어요"


"그럼요. 북도, 남도 마찬가지에요. 국방군도 보니까 제일선에는 죄다 어린 신병이나 학도병들이에요. 그들의 우직한 충성심을 이용하는 거지요."
"사실은 나두 육박전 때 우리 또래 국방군을 보구 많이 괴로웠디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김가나 이가, 아니면 박가일 텐데 말이야요."
"그럼요. 우리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국방군은 모두 한 핏줄의 형제들이에요. 사실은 내일 아침에 준기 동무는 유학산 고지 방어 참호조로 차출될 예정이에요. 오철수 사단작전참모가 나에게 김준기 동무가 부상에서 완치되면 즉시 보고하라고 하였어요. 곧장 참호조로 투입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 밤에 간이병동으로 찾아갔던 거예요. 준기 동무가 거기로 가면 십중팔구 살아날 수가 없을 거예요."
"메라구?"
"왠지 나는 준기 동무를 살리고 싶어요. 지난번 폭격 때 준기 동무가 나를 살려주었지요. 그래 나도 준기 동무를 꼭 살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솔직히 나도 살고 싶었고요. 우리 이 전선에서 벗어나 각자 집으로 가요. 지난 번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미제들의 쌕쌕이와 폭탄을 봤지요. 우리가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살아 집에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 거예요."
"아무튼 사지로 갈 나를 구해줘 고맙습네다. 하디만 요기서 우리들 집은 너무 멉네다."
"그렇다고 여기 이 골짜기에서 구더기 밥이 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집이 멀더라도 가다보면 언젠가는 닿을 테지요."
"하긴 기렇디요."
"난 이대로 죽긴 싫어요. 이제까지 가난하게 산 것도 억울한데 이 낯선 산골짜기에서 까마귀나 구더기 밥이 되는 건 정말 싫어요. 이다음 나는 성공한 간호사로 돈도 많이 벌어 바다 건너 외국 구경도 하고, 부모님도 호강시켜 드리려고 해요. 우리 어머니는 입때껏 한 끼도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배부르게 먹지 못했어요. 나는 살고 싶어요. 우리 같이 가요?"

순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흐느꼈다. 그 울음에 준기의 마음이 흔들였다. 준기는 그 순간 다시 부모님의 마지막 말씀이 들렸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라."
"이 오마니는 네레 훈장을 따오기보다 기더 무사히 돌아오기만 빌가서."

그 말에 준기는 갑자기 용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순희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준기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로, 잠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기럽세다. 나두 진작부터 우리 아바지 오마니가 몹시 보고 싶었디요. 요기를 탈출하고픈 생각은 때때로 가젯디만(가졌지만) 무서워 감히 엄두를 내디 못했디요. 역시 최 동무는 나보다 깡다구가 셉네다. 기래 우리 요기를 떠납세다. 어디 사람이 두 번 죽나요."
"고마워요."
"뭘요. 나두 항께(함께) 사는 일인데."

맹세

그들은 키스가 서로 간 굳은 맹세인 양, 다시 길고도 깊게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기는 그 키스 여운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우선 낙동강을 건넌 뒤 경부선 철길을 따라 북으로 갑시다. 그러다 보면 서울도 나오고, 평양도, 영변도 나올 테지요."
"기럼요."
"낙동강 마진나루 수중교 일대는 틀림없이 또 다른 독전대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나두 알고 있수. 아무래도 우리에게 눈에 익은 임은동 쪽으로 갑세다."
"강이 깊으면 어쩌지요. 저는 수영이 서툴러요."
"내레 걸음마 적 때부터 청천강에서 헤엄을 텟으니까(쳤으니까) 염려 마시라요."
"어차피 우리 목숨은 하늘에 달렸을 테지요."
"너무 걱정 마시라요. 다행히 올 여름은 가뭄이 심하여 낙동강이 별로 깊지 않을 거야요. 우리 가면서 장대나 긴 나뭇가지를 구해봅세다."

a  칠곡 자고산에서 바라본 오늘의 낙동깅. 멀리 바라보이는 왼편 산이 구미 금오산이다.

칠곡 자고산에서 바라본 오늘의 낙동깅. 멀리 바라보이는 왼편 산이 구미 금오산이다. ⓒ 손현희 시민기자 제공


모래톱

앞장 선 준기의 발걸음이 다부졌다. 그들 머리 위 은하수는 황홀 찬란했다. 그들이 임은동 건너편 새터 마을에 이르렀을 때까지 7월 그믐달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무척 다행이었다. 희미한 달빛이 있으면 아무래도 독전대에게 발각될 위험이 높다. 준기는 언저리가 어두워 장대는 구하지 못하고, 대신 강가 버드나무에서 기다란 가지를 하나 꺾었다.

"순희 동무, 강을 건너는 동안 이 나뭇가지를 절대루 노티디(놓치지) 말구 꽉 잡으라요."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부터 우리 서로 동무라는 말은 쓰지 맙시다."
"알가시오, 순희 동무."
"동무라는 말은 쓰지 말렸는데…."
"습관 때문이디요. 기래서 네로부터 팔자 고티기(고치기)가 힘들다구 했디요. 기럼, 동무를 메라구 부르면 돟갓수(좋겠소)?"
"마음대로 부르세요."
"누이가 어떻갓소(어떻겠소)? 내레 두 살 더 적으니까."
"좋아요."

곧 그들은 강변 모래밭에 이르렀다.

"자, 순희 누이. 이제부터 강 모래톱이니까 아무 말 말라요. 혹 독전대 아새끼들이 요기에 숨어있을디두…."
"알겠습니다."

준기뿐 아니라 순희의 대꾸에도 강을 건너다가 죽어도 좋다는 강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a  낙동강(경북 안동, 2004. 5. 21.).

낙동강(경북 안동, 2004. 5. 21.). ⓒ 박도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애독자가 보낸준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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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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