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아이의 모습, 가끔 말도 하고 꺄르르 웃기도 한다.
김용주
자주, 남편의 육아 분담에 대해 희생 내지는 헌신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가부정적 성역할이 남성에게 육아의 짐을 덜었다기보다 오히려 어떤 '결핍'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아이의 입에 넣어줄 때의 느낌, 한 숟갈 입에 넣고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최고!"라고 소리를 지를 때 드는 묘한 성취감,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아이들 속에서 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놀던 장난감들을 다 내려놓고 달려와서 작은 팔로 목을 끌어안아줄 때.
토닥여주며 재울 때 하던 옹알이들, 이제는 제법 또렷한 단어들, 문장들. 그 시시콜콜함에 자주 '빵터지는' 아내와 나의 웃음소리. 숨쉴 때 몸의 오르내림. 까딱이는 손가락, 꿈을 꾸는지 뭘 먹기도 하고 뭐라고 입모양을 만들다가 내 겨드랑이 속으로 얼굴을 파묻을 때 그 작은 몸뚱이의 촉감. 수시로 변하는 얼굴 표정과 발달 단계마다 보이는 특유의 표현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고, 아이가 듣는 것을 듣고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서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경험들, 그 일체를 하루하루 일에 찌들은 아빠들은 무시로 박탈 당하는 셈이다. 이렇듯 아이와의 교감은 일상을 함께하지 않으면 금전적 후원이나 관조적인 자세로는 결코 깊어지지 않는다.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 어떤 의미에서 좀 더 내 내면을 깊이 돌아본다면,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누는 이런 행복감 그 이면에는 내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터치'가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아이를 간지럽히고 안아주고 만져주고 쓰다듬어주고 '폭풍뽀뽀'를 쏟아부을 때 아이의 입장에서 느낄 감정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 감정을 추정하면서, 나또한 나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아버지가 나를 아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내가 잘 때가 지나서야 퇴근했다. 늦은 밤 자주 술에 취해서 들어왔고 어머니와는 금슬이 좋지 않았다. 또한 내 친구의 이름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절 알지 못했다.
가끔 아내에게 내 아이가 참 부럽다는 고백을 한다. 물론 그건 아내가 나보다 아이를 더 부드럽고 애정 가득하게 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내 스스로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뺨을 부비면서 잠들거나 함께 웃으며 흥겹게 놀던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아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 정서의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좋은 교훈이나 법칙, 지식보다는 좋은 유년 시절의 정서를 주고 싶은 아내와 나의 바람. 한편으로 그 씁쓸한 바람은 내가 아들에게 해주면서도 유체이탈하여 그것을 누리고 있는 '셀프 쓰다듬'에 다름 아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내가 울 때 나를 꼭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아이가 울길래 일어나서 꼭 안아줬다. 진정, 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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