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싸움에 빠진 NLL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서평] '제국의 귀태들'로 본 한일 현대사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등록 2013.07.23 16:38수정 2013.07.2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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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귀태들'. 이 책 제1장의 제목이다. '제국의 귀태들'이란 표현은 일본의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가 만들었다. 그는 일본 관동군의 독주에서 패전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 역사의 "비연속적 시대"로 규정했다.

저자들의 말을 빌리면, 이 시기는 "일본 전체가 '통수권'이라는 마물(魔物)에 의해 농락당하고 마술의 숲에서 헤매는 것 같은,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재액(災厄)의 시대"(284쪽)였다. 그가 이 시기를 '태어나서는 안 되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귀태(鬼胎)의 시대', 혹은 '이태(異胎)의 시대'로 명명한 이유다.


저자들에게 '제국의 귀태들'의 '제국'은 곧 만주국(1932년 3월~1945년 8월)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보기에 만주족은 그 짧은 역사 동안 전후의 일본과 해방 이후의 한국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족적을 남긴(현재에도 여전히 남기고 있는) 두 인물을 길러낸다.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와 한국의 박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인간성에 대한 소름이 끼칠 것 같은 니힐리즘과 끝도 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군인' 박정희는 권력의 본질이 폭력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최후의 참극을 겪을 때까지 힘(권력)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던 '독재자', 그것은 실로 무자비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중략) 이런 점에서는 '쇼와의 요괴' 역시 예사롭지 않다. 끝을 알 수 없는 권력의 데카당스로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국책수행에 섬뜩할 정도의 집념을 불태우며 "돈은 걸러서 쓰면 그만이다"라고 호기를 부린 기시 노부스케는 권력의 악마적 화신 자체였다. (10쪽)

이 책은 바로 이 두 사람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박정희를 한국의 괴물 같은 '독재자'이자 맥베스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그린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자 권세의 정치가로 불렸던 기시 노부스케는 '쇼와의 요괴'로 묘사된다. 저자들은 이 두 사람이 만주국을 매개로 인연을 맺는 과정을 통해 만주국와 전후의 일본, 그리고 해방 후 한국의 연속성을 고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해제를 쓴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평가처럼, 만주국과 만주국 인물을 중심으로 본 한일 현대사이자 한일 관계사로 보아도 될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와 '쇼와의 요괴'인 기시 노부스케는, 시바 료타적인 의미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시기인 '귀태의 시대'에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 곧 '귀태'들이었다. 그들을 하나로 엮은 것은,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만주제국의 '동창회' 인맥이었다. 그래서 저자들은 각각 '독재자'와 '쇼와의 요괴'로 불린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를 '제국의 귀태들'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저자들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이미 태어나 죽어버린 그들을 저자들은 왜 이토록 물고 늘어지는가. 저자들이 보기에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와 전후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저자들은 그 둘을 잇는 출발점으로 만주제국을 지목한다. 그렇다면 만주국과 전후의 일본, 그리고 해방 이후의 한국은 하나의 끈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지닌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새마을정신'과 '유신정신'을 연결해 이데올로기 통제를 강화하고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데 투신한 이선근을 비중 있게 소개한다. 그런 점에서 유신이념의 사상적 체계화를 기치로 설립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초대 원장이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그이자 박정희의 만주 인맥 중 핵심이었던 이선근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 제정에도 관여한다. 만주국과 1960~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그렇게 연결되고 있었다.

만주국의 건국체조가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시작한 라디오 '재건체조'로 이어진 사실, 만주국에서 실시되던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도 모두 박정희 정권기에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된 것들이다.


만주국은 기시 노부스케 같은 '귀태'와 똑같은 DNA를 물려받은 군인(박정희)의 요람지가 되었다. 해방 후의 분단국가 한국과 그전의 식민지 사이의 파워 엘리트 인맥이나 제도들의 연속성, 군인이나 관료의 유산,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두 차원에서의 의식이나 이데올로기의 교체와 변혁 등, 한국의 경우도 해방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역동적인 연속성이 가로지르고 있다. (286쪽)

이 '역동적인 연속성'이 현재에도 막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저자들의 말처럼, "그들은 마치 발 달린 망령처럼 되살아나 '독재자'와 '요괴'의 자식들을 움직"임으로써 현재 그들을 한일 양국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우울하면서도 심각한 질문을 내놓는다.

두 사람의 관(棺)에 못질을 안 한 탓일까, 아니면 그들을 부당하게 홀대해온 진보적 역사관의 왜곡이 이제야 바로잡혀가고 있는 것일까. (11쪽)

이 책에서 촉발된 '귀태(鬼胎) 논쟁'이 온 나라를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간 지 열흘 남짓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이 음습한 단어 하나를 두고 벌어진 격렬한 다툼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귀태 논란'은 정치적인 언어가 갖는 예측할 수 없는 폭발성의 위력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엔엘엘(NLL)'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자.

'엔엘엘'이라는 말이 단순한 군사 지리적 용어의 범주를 벗어난 지는 오래다. 그것이 국토 수호나 조국 안보라는 의미와 중첩되면서, 국가를 위한 전쟁의 이미지를 숭고하게 착색한다고 해석하면 지나칠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엔엘엘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지난 6월 25일 청와대 국무회에서 한 말)이 그저 나온 말은 아니겠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피'와 '죽음'이라는 단어로 '엔엘엘'을 묘사했을 때, 그것은 우리 국토의 '생명선'과 같은 의미의 두터운 옷을 껴입게 되지 않았을까. 많은 이가 지금 대한민국에 호전적인 국가주의나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우려하는 것도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기시 노부스케의 숙부이자 훗날 외무대신에 오르는 마쓰오카 요스케가 '생명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힘주어 강조했던 맥락도 이와 비슷했다.

명료한 '제국주의적 성질'을 띤 무력행사를, 진자(振子)가 돌연 한쪽으로 흔들리듯이 열렬히 지지했던 것은 산업화된 대중적 미디어이며, 이에 선동당한 국민이었다. 마침내 제국이 하나의 유행이 되고, 그것이 매스미디어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이다. (중략) 그 경우에 신문이나 라디오, 서적이나 잡지, 영화나 레코드 등이 대량으로 그리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하려고 한 슬로건은 "생명선 만몽(滿蒙)을 수호하라!"였다. (중략) 생명선이라는 슬로건은 1930년대 제국의 새로운 신화를 형성하는 데 가장 매력적인 단어였다. (42~44쪽)

마쓰오카 요스케가 '생명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명료화한 것은 1931년 1월 의회 연설에서였다. 저자들은 그후 이 '생명선'이라는 용어가 일본 전역에서 순식간에 호전적인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마술의 키워드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국가정보원과 새누리당이 터뜨린 엔엘엘 논란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에 따른 부정적인 여론의 기류를 돌리기 위한 의도가 짙다. 일종의 물타기였던 것. 하지만 이제 엔엘엘 논란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까지 '안보 장사'로 재미를 톡톡히 봐 온 새누리당에게 '엔엘엘'은 당분간, 아니 통일이 되기 전까지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멋진 '꽃놀이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엘엘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사태가 암담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래서다. 새누리당과 대통령이 엔엘엘을 '국토 생명선'이니 '최후의 보루'니 하는 말로 국민들을 겁박할 때, 우리는 '평화'와 '상생'의 프레임을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당장 불안에 떠는 국민들의 귀에 이 말들이 쏙쏙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불안을 가시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전쟁을 원하는가, 아니면 평화를 원하는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게 우리가 단호하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강상중 · 현무암 지음 | 책과함께 | 2012. 9. 20 | 350쪽 | 1만 7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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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책과함께, 2012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강상중 #현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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