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비를 소재로 한 강릉관노가면극을 소개하는 우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머슴으로 불린 고공(雇工)은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을 했다. 조선 후기 관료인 서유영이 편찬한 실화집 혹은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의병장 고경명의 자손인 고유(高庾)가 한때 머슴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유는 양인 신분의 소유자였다. 이처럼, 머슴 혹은 고공은 원칙상 양인이었다.
그런데 17세기까지는 머슴보다 노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17세기까지는 노비가 산업현장의 대표적인 노동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의 밑에서 일하려면 그 사람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40~50% 정도였다. 이 비율은 과거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더 높아졌다. 노비제도가 약해진 18세기 후반에도 이 비율은 30%를 넘었다.
이렇게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고 그들 대다수가 노동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남의 밑에서 일하려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먹고 살려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들은 면천을 환영했을까?결론이 어느 정도 나온 것 같지만,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구암 허준>을 비롯한 수많은 사극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열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희망했다'(A)는 사극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의 말로 바꾸면 '노동자들은 항상 퇴사를 희망했다'(B)가 될 것이다. B 문장은 우리 시대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A 역시 조선시대 실정에 맞지 않는다. 노비제도의 실태를 검토해보면 이 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됐다. 이 중에서 공노비(관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됐다. '선발된 노비'라는 뜻인 선상(選上)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고 비번을 활용해서 영리활동을 했다.
한양의 선상노비는 2교대 근무, 지방의 선상노비는 7교대 근무를 했다.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농사를 하건 장사를 하건 그것은 선상노비의 자유였다. 또 선상노비의 일종인 관기가 비번을 활용해서 민간 술집에서 서빙을 보건 자기 농토에서 농사를 짓건, 그건 본인의 자유였다.
납공노비의 상당수는 국유지를 불하받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수확물의 일부를 지주인 국가나 왕실에 납부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많은 납공노비는 이런 형태로 존재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됐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주인의 일을 처리했다. 외거노비는 독립적 주거지에 살면서 주로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납부했다. 물론 모든 외거노비가 소작농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다. 주인에게 농작물 이외의 물건이나 서비스를 납부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위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면천이 노비에게 확실한 이익을 주는 경우는 선상노비뿐이었다. 선상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면천이 이익을 의미했다. 그래서 면천을 가장 열렬히 희망하는 쪽은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서리 자격으로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는 대신에 상관의 묵인 하에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 선상노비들은 면천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무식한 노비들이 어떻게 서리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서리 중에는 노비가 매우 많았다. 노비 중에 시인이나 서당 훈장도 적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무식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유(有)임금인 양인보다 무임금인 노비를 서리로 기용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유리했다.
선상노비와 달리, 납공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의 경우에는 면천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국유지를 불하받아 먹고사는 납공노비의 입장에서 면천은 국유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더 좋은 일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면천은 곧 실직이었다. 만약 국가가 특정 지역 납공노비들에게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공약했다면, 그 노비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생계 보장을 요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