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의 면천은 사실상 '실직'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구암 허준>, 네 번째 이야기

등록 2013.07.25 10:58수정 2013.07.2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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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 허준>의 주인공인 허준(김주혁 분).
<구암 허준>의 주인공인 허준(김주혁 분). MBC

MBC <구암 허준>은 16세기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다. 현재까지 이 드라마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 이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은 허준에게 "어의가 되면 면천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곤 한다. 다른 사극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암 허준>에서는 면천에 대한 열망이 특별히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물론 실제의 허준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자유인)이었다. 따라서 실제의 허준이 면천에 대한 꿈을 꿨을 리는 없다. 드라마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조선시대 노비들이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열렬히 면천을 꿈꾸었을지 조사해보자. 

노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노동자'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용자는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을 통해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주인과 일꾼이 대등한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관념으로 일꾼을 소유했다. 주인이 물건처럼 부릴 수 있어야만 주인-일꾼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법적으로 자기의 '물건'이 된 사람을 일꾼으로 채용했다. 법적으로 대등한 인격체를 하인으로 부린다는 것은 그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노비를 소재로 한 강릉관노가면극을 소개하는 우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관노비를 소재로 한 강릉관노가면극을 소개하는 우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머슴으로 불린 고공(雇工)은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을 했다. 조선 후기 관료인 서유영이 편찬한 실화집 혹은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의병장 고경명의 자손인 고유(高庾)가 한때 머슴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유는 양인 신분의 소유자였다. 이처럼, 머슴 혹은 고공은 원칙상 양인이었다. 


그런데 17세기까지는 머슴보다 노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17세기까지는 노비가 산업현장의 대표적인 노동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의 밑에서 일하려면 그 사람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40~50% 정도였다. 이 비율은 과거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더 높아졌다. 노비제도가 약해진 18세기 후반에도 이 비율은 30%를 넘었다.


이렇게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고 그들 대다수가 노동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남의 밑에서 일하려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먹고 살려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들은 면천을 환영했을까?

결론이 어느 정도 나온 것 같지만,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구암 허준>을 비롯한 수많은 사극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열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희망했다'(A)는 사극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의 말로 바꾸면 '노동자들은 항상 퇴사를 희망했다'(B)가 될 것이다. B 문장은 우리 시대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A 역시 조선시대 실정에 맞지 않는다. 노비제도의 실태를 검토해보면 이 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됐다. 이 중에서 공노비(관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됐다. '선발된 노비'라는 뜻인 선상(選上)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고 비번을 활용해서 영리활동을 했다.

한양의 선상노비는 2교대 근무, 지방의 선상노비는 7교대 근무를 했다.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농사를 하건 장사를 하건 그것은 선상노비의 자유였다. 또 선상노비의 일종인 관기가 비번을 활용해서 민간 술집에서 서빙을 보건 자기 농토에서 농사를 짓건, 그건 본인의 자유였다.

납공노비의 상당수는 국유지를 불하받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수확물의 일부를 지주인 국가나 왕실에 납부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많은 납공노비는 이런 형태로 존재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됐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주인의 일을 처리했다. 외거노비는 독립적 주거지에 살면서 주로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납부했다. 물론 모든 외거노비가 소작농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다. 주인에게 농작물 이외의 물건이나 서비스를 납부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위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면천이 노비에게 확실한 이익을 주는 경우는 선상노비뿐이었다. 선상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면천이 이익을 의미했다. 그래서 면천을 가장 열렬히 희망하는 쪽은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서리 자격으로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는 대신에 상관의 묵인 하에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 선상노비들은 면천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무식한 노비들이 어떻게 서리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서리 중에는 노비가 매우 많았다. 노비 중에 시인이나 서당 훈장도 적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무식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유(有)임금인 양인보다 무임금인 노비를 서리로 기용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유리했다.

선상노비와 달리, 납공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의 경우에는 면천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국유지를 불하받아 먹고사는 납공노비의 입장에서 면천은 국유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더 좋은 일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면천은 곧 실직이었다. 만약 국가가 특정 지역 납공노비들에게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공약했다면, 그 노비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생계 보장을 요구했을 것이다.

 나무하는 사노비의 모습.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나무하는 사노비의 모습.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솔거노비의 경우에, 면천은 주인집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적인 주택과 생계수단을 확보한 솔거노비라면 당연히 면천을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비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에게도 면천은 이익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외거노비의 입장은 납공노비의 입장과 거의 유사했다. 주인집 농토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는 외거노비한테 '너, 이제부터 면천이야'라고 말하면, 그 노비의 얼굴은 금방 험악해질 것이다. 대다수의 외거노비는 면천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기 땅을 경작하면서 주인한테 공물을 바치는 외거노비들도 있었다. 또 독자적으로 상업 활동을 하면서 화폐(쌀·옷감·동전)를 공물로 바치는 외거노비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면천이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보다는 이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면천은 원칙상 '생계수단 상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선상노비를 제외한 나머지 노비들은 면천을 환영하기보다는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면천을 받으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노비들한테는 그보다는 생계유지가 더 긴요했다. 노비가 되어야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시대에 면천은 사실상 '실직'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세기부터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시장이 발달하고 도시가 형성되면서, 농업 이외의 방법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18세기부터는 주인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비들이 많이 생겨났다. 따라서 면천에 대한 반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노비제도는 농업경제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는 이 제도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업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주인의 집을 떠나 다른 주인 혹은 다른 도시로 이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18세기 이후의 노비들은 면천을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사극이나 소설 속의 노비들이 항상 면천을 희망하는 것은, 사극이나 소설을 만드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노비는 주인의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면천=실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노사관계 역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먼 훗날의 사람들 중에는 '대한민국 시대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항상 퇴사를 희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자본가한테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우리 시대 노동자들은 원칙상 퇴사를 희망하지 않는다. 노동조건을 바꾸고 싶어 한다면 모를까, 사용자의 착취가 싫다고 해서 '면천'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노비들의 대다수도 그런 정서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면천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암 허준 #면천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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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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