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1주년 기념일을 병원에서... 내년에는 제발!

[여보, 일어나⑦] 팔걸이 의자에서 새우잠 자는 사람들

등록 2013.07.30 08:59수정 2013.08.0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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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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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라 상상도 못했었는데... 2008년 4월, 발병하기 한 달 전 딸아이의 전국양궁대회 연습장에 응원 차 갔을 때의 건강했던 아내. 불과 한 달 후에 무슨 일이 닥치고, 인생이 통째로 곤두박질 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4개월 전 종합건강검진에서도 정상판정을 받았건만... ⓒ 김재식




"일어나세요! 여보세요.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아, 알았어요, 일어난다니까요!"

'작년에도 그 소리 들으면서도 잠 잘 자기만 했는데, 새삼스레... 투덜투덜~~'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강남 S병원 1층 로비, 낮이면 수납 대기자로 북적이다가 밤이면 조용해진다. 밤이 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슬슬 담요 하나씩 들고 나타난다. 팔걸이 달린 의자 두 개나 세 개씩을 차지하고 몸을 뱀처럼 요리조리 집어넣거나 팔걸이를 타고 넘어 잠을 청한다. 대부분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 가족을 누이고 잠들 곳을 찾아 나온 보호자들이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경비원들에게 깨우고, 보호자들은 일어나는 반복 현상이 일어난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듯, 날마다.

아내가 호흡마비가 와서 7월 24일 새벽 3시에 이곳 병원 응급실로 왔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고 있다. 횡경막과 폐가 마비되었다고 한다.


응급실로 옮겨 가는 사람들, 1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모습

모자라는 잠, 곤두선 신경, 불안과 무거움을 꾸역꾸역 끌고 유령처럼 일어나 세면장으로 혹은 응급실로 옮겨가는 사람들, 1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모습이다. 여기만 그럴까? 대한민국에 규모가 크다는 응급실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마다 대개 비슷한 풍경이다.

그 줄 속의 어디쯤에 나도 끼었을 거다. 더한 사람들은 좀 덜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래도 살만한 사람들은 더 심한 사람들의 사연에 위로삼아 기운을 내면서 그 뒤에 숨어 좀 안심을 한다. 그것도 힘이 되다니...

이제 어디서 아침을 때우고, 오전에 한번 있는 중환자실 면회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무슨 당기는 입맛이 있다고 밥을 꼬박 찾아 먹느냐며 아예 안 먹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는 대로 중환자실을 들어가서 허락된 20~30분의 면회를 하고 나온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비몽사몽 보낸 아내는 나를 보더니 말도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내뱉고 들이마시고 자동으로 숨을 돕는 마스크를 차고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지만, 그저 손을 꼭 쥐고 "괜찮아 질 거야. 잘 치료해 줄 거야, 무서워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내자"라며 누구나 하는 녹음기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물러나왔다.

다시 저녁 7시 30분 두 번째 면회까지는 병원 안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야 한다. 집이 있는 충주까지 내려가 있을 수도 없고, 어차피 언제 부를지도 모를 중환자실 호출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 피로가 몰려오고 온갖 상상으로 두려움이 짓누르면 어김없이 생기는 질문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오전에 보고 온 아내의 숨찬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여보. 나 무서워. 나 좀 살려줘!'하는 듯 바라보는 눈빛이 떠나지 않는다.

중환자실에서 보고 나온 어떤 가족들이 잘 참고 나와선 통곡을 한다. '아, 우리는 일렬로 선 불행순서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 머릿속을 스친다. 그렇게 오늘도 넘어간다. 나보다 힘든 상황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아내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런 몇 가지가 비논리적으로 섞여 가슴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다.

다시 저녁시간이 되니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 사람 두 사람, 담요와 잡지 등을 미리 던져 자리를 잡아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서두르고 서로 간에 눈치를 본다. 엄청 큰 불행이 있어도 배고프고 춥고, 고단한 몸은 사람을 끌어내린다. 그래서 잠시라도 잊어지고 덜어진다.

"아주 일상적인 밥을 먹고 볼 일을 보고 잠자고 해야 한다는 신체의 연약함을 감사해야 한다. 살다 생기는 큰 마음상처를 달래는데 요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를 여리게 창조하셨나보다."

생각해보니 좋은 날들을 그냥 병원에서 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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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이 휩쓸고 간 자리 발병 후 1년 만에 극심한 통증과 식사불능으로 뼈만 남은 아내, 워낙 통뼈라 어지간히 아플 때도 여위지 않던 다리가 정말 눈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말라버렸다. 평상시 체중에서 15k 정도 빠졌다. ⓒ 김재식


집사람이 중환자실을 많이 두려워하고 힘들어 했는데, 다행히도 스테로이드 주사가 3일 만에 반응이 왔다. 빨리 온 편이다. 산소 호흡기를 빼고 입원실로 옮겼다. 죽을 조금씩 먹어보고 주사를 종류별로 맞고 있다. 한 고비를 넘긴 듯 해 마음이 좀 놓인다. 제발 당분간만이라도 이대로 변동 없이 갔으면 좋겠다. 진짜로 좀 쉬고 싶은데...

8월 10일경부터 꼬리뼈 부분이 자꾸 아프다더니 빨갛게 물들고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하고 싶고 두렵던 욕창이 마침내 들이닥치는 것 같아 심란해진다.

초기 욕창과 씨름하는 사이 어느새 9월 3일이 되었다. 오늘은 집사람과 내가 결혼한 지 21년 되는 결혼기념일이다, 작년 이 날, 그 무섭고 두려운 검사결과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우리에게 건네졌던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으로, 그러나 시간은 좋은 기억이나 나쁜 기억이나 상관없이 다시 되돌아 온 듯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는 걸 실감한다.

'내년 결혼기념일에는...'이라고 작년에도 그랬고, 그 작년의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역시 아무 곳도 못가고 아무 것도 선물하지 못한 채로 내년에는 나들이라도 하자고 다짐하면서 과일 몇 개를 먹으며 보냈다. 그러고 보니 지난 8월 5일 아내 생일에도 병실에서 보냈고. 더 전인 지난 설날은 강원도 요양원에서 보냈고. 거슬러 올라 작년 추석도 이곳 강남 S병원에서 보냈다. 생각해보니 좋은 날들을 그냥 병원에서 다 보냈다. 에휴...

벌써 이곳 응급실로 들어와 중환자실을 거쳐 신경과와 다시 재활과로 옮겨온 지 한 달 반이 넘었다. 그때 위급하고 가슴 답답하던 심정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나는 불과 며칠 중환자실을 지키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를 중환자실에 누이고 50일이나 바깥에서 기다린 엄마도 같은 병실에 있었다.

겨우 19개월 된 아이, 어느 날 놀다가 넘어져서 가볍게 병원을 갔더니 뇌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악성으로 진단되어 수술도 해줄 수 없다는 병원의 말에 아직도 어린 엄마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니던 성당의 수녀님이 기도 중에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검사했더니 기적처럼 양성으로 진단이 바뀌어 수술을 들어갔다. 그런데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고 50일을 중환자실에서 무의식 상태로 지냈다.

나는 아내가 불과 며칠을 중환자실에 있는데도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정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심정으로,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며 버틴 며칠이 몇 달 같기만 했는데 그 아이 부모는 50일을 어떻게 버티었는지 상상만으로도 나는 숨이 턱 막힌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얼마나 성격이 느긋하고 잘 웃는지 내가 그 아이에게 흠뻑 빠졌다. 흰옷 입은 의사만 보면 울면서도 아픈 것은 잘 참고, 밥도 잘 먹어주고, 하루 종일을 누워 지내도 잘 보채지도 않는다. 졸릴 때만 빼고는. 나는 그 아이에게 손바닥을 비비며 '쏘리 쏘리' 하는 춤 동작을 가르쳤더니 들기도 힘든 팔로 따라 해서 병실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웃으며 기뻐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우리 세 아이들이 큰 병 아프지 않으면서 커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무조건 3주후 퇴원, 입원의 마지막 코스... 퇴원해도 걱정

그러는 사이에도 날짜가 자꾸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곳 병원의 규칙인 무조건 3주후 퇴원이라는 입원의 마지막 코스, 재활과 입원도 벌써 3주를 지나 열흘을 더 넘겼다. 환자들이 아무리 우겨도 연장해주지도 않을 제한 기일을 교수님의 지시로 늦추고 있다. 그만큼 예상보다 회복이 안 되고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해서다.

드디어 재활과 담당선생님도 결정을 내렸다. 12일 토요일은 퇴원하라고 일정이 나왔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몇 군데 재활병원 갈 곳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다. 지금 여기에서는 간호사들이 3~4시간마다 호스로 소변을 빼내주는데 재활병원 간호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간병인들이 해야 한다. 내가 잘 해낼 수가 있을까?

그밖에 또 다른 문제도 내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1년 반 정도, 15군데 정도 병원생활을 전전하는 동안에 일을 거의 못했다. 집도 팔았고, 아내 앞으로 사용한 신용카드도 벌써 연체로 신용 불량등록이 되었고, 이번 입원으로 또 빌린 돈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어쩌면 아파서 죽기 전에 굶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해보지만 편치가 않다.

하루하루 날짜는 가는데 아내와 어젯밤부터 이 일을 의논하다가 눈물만 흘리는 아내를 보고 말을 중단했다. 우리는 20년이 넘도록 어떤 일도 터놓고 의논해서 풀어가며 살았는데 이번 일은 도저히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 같다. 혼자 알아서 끙끙거리며 해결해 보아야할 것 같다.

"...나만 믿어! 내가 알아서 할게!"

(... 그러나 어떻게?)

이럴 때마다 이 병이 차라리 암이나 심장마비처럼 단번에 결정이 나는 병이었으면 하는 생각들이 불쑥 몰려온다. 얼마나 나쁜 생각이고 그 병을 앓는 환우들에게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실 지도 모르는 데도.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길을 열심히 찾아보아야겠다. 안 되면 장애인 시설이나 산 속이라도 들어가든지... 오늘 주치 의사 선생님께 며칠만 더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들어주실지 모르겠다.

기약 없는 희귀난치병 환자와 그 가족들의 기나긴 투병은 사람을 야금야금 뜯어먹는 괴물에게 포로로 잡혀 살아가는 먹잇감이 된 심정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으로도 실감이 안 날 수도 있는 현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2009년 7월부터 2009년 9월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중환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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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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