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 금오산 신령님이 점지해주신 기데이"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31) # 9. 금오산 ②

등록 2013.08.20 10:35수정 2013.08.2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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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 ⓒ 박도


산골생활

아홉산골짜기는 금오산 우측 능선 아래 깊은 계곡으로 이곳에 이르면 하늘만 빠끔했다. 아침 해가 아홉 시 무렵에야 뜨고, 오후 네댓 시만 되면 저물었다. 해평 영감 내외는 이 골짜기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그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억새초가 집 언저리 텃밭에다 배추를 부지런히 심어 해평 영감이 지게로 구미 장에 내다 팔았다. 배추농사만으로는 생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봄 여름철에는 금오산에서 고사리도 꺾고, 송이와 버섯도 따고, 약초도 캐고, 가을철이면 꿀밤(도토리)을 주어다가 도토리묵도 만들어 팔았다. 그 돈으로 쌀이나 보리 등 양식이나 소금, 멸치, 석유 등 생필품을 사다 썼다. 해평 영감 아들딸들은 모두 일찍 출가하여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준기와 순희는 해평 영감 내외에게 아홉산골짜기로 들어온 사정을 말한 뒤 당분간 피난처를 부탁드렸다. 하지만 그들이 인민군 탈영병이라는 사실과 준기가 벙어리가 아닌 것만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해평 영감 내외는 더 이상 꼬치꼬치 그들의 전력을 캐묻지 않았고, 또한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도 보지 않았다. 준기와 순희는 그들 내외를 속이는 게 대단히 미안했지만 만일을 위해 굳이 사실대로 발설치 않았다.

해평 영감 내외는 그들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면서 한 방에서 지내다가 난리 끝나면 가라고 했다. 하지만 준기와 순희는 그 댁 헛간을 고쳐 거적을 덧씌운 뒤 임시거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밥값은 하겠다고 아무 일이라도 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험한 일 안 하다가 하겠나. 마, 그만 며칠 푹 쉬었다 가라."
"아닙니다. 열흘 쉬었다가 갈지, 보름 쉬었다가 갈지, 잘 모르는데 마냥 손님처럼 빈둥빈둥 놀 수도, 또 그렇게 놀면 저희가 더 괴롭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시켜주세요."
"그라믄(그러면) 우리 따라 댕기(다니)면서 너덜이 눈썰미 있게 보고 해라."
"네, 할머니.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순희는 해평 할머니를 쫓아다니면서 각종 약초를 캐거나 버섯을 땄고, 준기는 해평 영감을 따라다니면서 나무를 했다.

"젊은 사람이 눈도 밝고, 심(힘)도 세서 우리가 사나흘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다 하네."


영감 내외는 그들에게 매우 흡족하게 말했다. 순희는 첫날은 할머니의 부엌일을 돕다가 다음 날부터는 아예 도맡았다.

"난리 끝나도 집에 가지 말고 그만 여서(여기서) 우리 아들딸 해라."
"정말 그럴까예."

순희는 금세 배운 경상도 말로 대답했다.

"그라믄 좋지."
"할머니, 사람 앞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사는 동안은 아들딸처럼 지낼게요."
"그래라. 너덜 양식 걱정은 쪼매도(조금도) 하지 마라. 우리 영감이 준비성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다. 햇곡식 나올 때까지 양식은 벌씨루(벌써) 다 준비해 놨다. 마, 두 입 늘어도 한두 달은 까딱없을 끼다."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마음 편하게 지내겠습니다."
"너덜이 온 것도 다 금오산 신령님이 점지해 주신 기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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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도선골 ⓒ 박도


정화수

준기는 날마다 나무지게를 지고 금오산으로 올라갔다. 금오산 중턱에 이르면 낙동강도 보이고 천생산, 유학산도 빤히 보였다. 때때로 미 폭격기가 유학산 일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가는가 하면, 다부동 너머 유엔군 측 진지에서 쏜 포탄이 유학산 정상이나 뒤 능선에 흰 먼지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해평 영감 내외는 아침저녁으로 계곡 우물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금오산 산신령에게 빌었다. 순희와 준기가 아홉산골짜기로 들어온 지 나흘이 지난 밤, 순희는 잠자리에서 준기에게 그들도 영감 내외를 따라 아침저녁 정화수를 떠놓고 함께 빌자고 제의했다. 준기도 좋다고 고개를 끄떡여 이튿날 아침, 순희는 물그릇을 얻어 정화수를 담은 뒤 그들도 영감 내외를 따라 빌며 기도를 드렸다.

"금오산 산신령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빌면 틀림없이 너덜 고향집으로 델다줄 끼다."
"하마, 그러고 말고."

그날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서 해평 영감 내외는 번갈아 가며 당신네들이 금오산 아홉산골짜기에 들어온 이야기와 금오산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해평 영감은 무식한 산골노인이 아니라 원래 해평면 송곡리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 1910년 초 그가 열두 살 때 이웃마을 열다섯 살 난 처녀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뒀다. 어느 해 여름과 겨울에 열 살, 여덟 살난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큰 녀석은 동네 웅덩이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져죽었고, 둘째 아들은 그해 겨울 낙동강에서 부모 몰래 썰매 타다가 빠져 죽었다. 그 뒤 두 딸을 낳은 뒤 다시 아들을 얻었다. 어느 날 도리사 스님이 그 사연을 다 들은 뒤 한 마디 하였다.

"강마을 떠나 산으로 가시오."

그래서 그들 내외는 두 말 않고 서당 훈장생활을 접은 뒤 해평을 떠나 금오산 아홉산골짜기로 와서 배추농사를 지으며 산골사람으로 산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지마다(저마다) 복이 있고, 연이라카는 게 있데이. 아무리 좋은 고대광실도 지(제) 복과 연에 안 맞으면 몬 산다. 우리 식구가 이 답답은 산골째기에 들어온 이후에는 희안하게도 빌(별) 탈이 없는 기라. 다 산신령님 덕분 아이겠나."

해평 할머니의 말이었다. 순희와 준기는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구미 금오산은 영남팔경의 하나로, 골짜기마다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금오산(金烏山)'이란 이름은 먼 옛날 이 산 멧부리로 금빛까마귀가 날아갔기에 붙여졌다. 고려 말 삼은의 한 분이었던 야은 길재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고향인 이 금오산에 내려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선생의 제자였던 방원이 후일 태종 임금이 되어 여러 차례나 벼슬을 내려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끝내 사양했다. 야은 선생은 금오산에 묻혀 살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 영남학파의 시조가 되었다. 야은 선생을 이어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등의 선비들이 이 고장에서 태어나거나 자랐다.

신라 때 도선이 한때 금오산 토굴에서 도를 닦았는데, 지금도 그 도선굴이 산 중턱 큰 폭포 옆에 남아 있다. 그때 도선은 이 산기슭에서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 난다고 예언했다. 하지만 도선은 그 비점은 일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비점을 찾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여태 그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금오산을 바라보고는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와불상(臥佛像)'으로 이 고을에서 군왕이나 성인이 태어날 거라고 예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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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금오산 ⓒ 구미시 자료사진


그런 풍수설 때문인지 금오산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살고 있었다. 인동에 살던 장씨네도 그 풍수설을 듣고 금오산 남쪽 오태동으로 이사를 왔고, 김해에 살던 허씨네도 어느 날 배를 타고 상주 쪽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낙동강 강마을에서 하룻밤 묵으며 금오산 경치에 반한데다가 그 풍수설을 들고는 그만 임은동에다 터를 닦았다.

"사람이 지 분수를 알아야제. 마, 우리는 그런 큰 욕심은 하나도 없다. 그저 우리 아들딸들 무고하고, 우리 영감과 내캉 살만큼 살다가 편안케 죽고 싶은 그 욕심밖에 없다."
"내는 마, 두 쪽 난 나라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모든 백성들을 골고루 잘 살게 하는 어질고 훌륭한 그런 인물이 나오기를 빌 뿐이데이. 지(제) 나라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지 않고, 탐관오리를 발흥시켜 민란이 일어나자 감당치 못한 채 외국군대를 끌어들이거나 주지육림에 빠지는 고약한 군왕은 차라리 이 고을에서 안 나오는 게 낫다."

"처음 이 산골짜기에 와서 정화수 떠놓고 산신령님한테 빌 때는 우리 식구들 복 달라고 빌었는데, 차차 나라가 평안하라고 더 마이 빈다. 알고 보면 이 땅에 사는 조선백성들이 모두 편해야 우리도 편한 기라. 너덜이 온 뒤는 내 맘속으로 무사히 고향집에 돌아가기를 마이 빈다."

해평 영감 내외는 번갈아 긴 이야기를 마친 뒤 다시 금오산 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신령님, 어짜든동 저 아덜 고향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이소."

순회와 준기도 내외분의 그 기도소리에 따라 두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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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의 유시 '회고가' 돌비석 ⓒ 박도


삐라

준기와 순희가 아홉산골짜기로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난 뒤부터 유학산 쪽에서 폭탄소리와 포탄소리가 점차 잦아지더니 며칠 전부터 아주 딱 끊어졌다. 그 대신 미군 폭격기는 계속 북녘으로 날아갔다. 이따금 정찰기가 금오산 일대를 휘젓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렸다. 마침 금오산 계곡과 집 언저리에 떨어진 삐라 여러 장을 주웠다. 유엔군 측에서 인민군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들이었다.

SAFE CONDUCT PASS 안전보장증명서
북한군 장병들에게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1. 밤에 부대를 떠나서 날이 새거든 국제연합군이나 한국군 쪽으로 넘어오시오.
2. 큰 도로나 작은 길을 걸어오시오. 도로나 길이 없으면 들판을 걸어오시오.
3.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이 삐라를 흔들든지, 또는 될 수 있으면 흰 물건을 흔들면서 오시오. 이렇게 하면 국제연합군은 당신이 귀순하는 줄 알고 당신에게 사격을 하지 않을 겁니다.
4. 귀순할 때는 이 삐라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안전보장증명서 SAFE CONDUCT PASS
북한군 병사들에게!
유엔군은 당신들이 유엔군 쪽으로 넘어오면 병자나 건강한 자를 막론하고 좋은 대우를 할 것을 보증한다. 당신들이 부상했거나, 고통을 받거나, 기타 어떠한 병에 걸려서 신음하더라도 유엔군 쪽으로 넘어오면 당신들은 충분한 치료를 받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생명과 건강을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빨리 넘어 오라. 좋은 음식과 따뜻한 의복과 맛 좋은 담배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

대한민국 병사에게
이것은 적의 군인으로서 누구나 항복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인도적 대우를 보증하는 증명서이다. 이 사람들을 가까이 있는 당신의 상관에게 데리고 가시오. 이 사람을 명예로운 포로로 대우하시오. 맥아더 장군 명령

북한병사들아!
지금 곧 투항하여 생명을 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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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측에서 뿌린 삐라 ⓒ NARA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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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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