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헐떡이며 이른 추풍령, 불 켜진 외딴 집이 보였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34) # 10. 추풍령 ②

등록 2013.08.24 14:42수정 2013.08.2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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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가는 피난민행렬(1951. 1.) ⓒ NARA, 눈빛출판사


배꼽시계

순희와 준기는 상여집에서 얼마를 잤을까? 순희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순희는 준기의 품에서 살그머니 벗어나 상여집 바깥으로 나갔다. 소변을 보고 온 듯했다. 준기도 잠을 깬 뒤 일어나 바깥에 나가 가벼운 운동과 함께 소변을 본 뒤 자리로 왔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었다.


"아직도 저물려면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아요."
"기러쿠만요."

그때 준기의 배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 점심 먹어요."
"기럽시다. 내레 배꼽시계는 아주 정확하구만요. 이럴 땐 메칠 굶어도 까딱없어야 하는 건데."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전선에서 도망간 전사들이 많지요. 사실은 우리도 그래서 도망쳤지요. 이제 그런 전사들이 이해가 되네요."
"아, 기래서 미제 놈들은 기런 약점을 알구서 삐라에도 온통 배불리 잘 먹구 따듯한 곳에서 잠잔다고 적어 날려 보내디요." 

순희가 쌀자루에서 남은 주먹밥 두 개를 꺼냈다.

"이게 마지막이예요."


준기는 주먹밥을 건네받고 후딱 씹어 삼켰다. 순희가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반을 남게 준기에게 넘겼다.

"누이 드시라요."
"난 갑자기 배가 아파 더 못 먹겠어요. 이럴 땐 굶는 게 약이에요."


준기는 불안스럽게 순희를 바라보다가 남은 주먹밥을 후딱 삼켰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나간 뒤 한참 후 약간 깨진 뚝배기 그릇에다가 물을 가득 담아왔다.

"고마워요. 내가 나가 먹어도 되는데…."
"들랑날랑 하다가 마을사람 눈에 띠면 국방군이나 치안대 애들에게 붙잡힙네다."

순희가 다시 준기 품에 안겼다. 준기가 순희 배를 주물렀다.

"배가 아프다고 햇디요?"
"됐어요. 동생이 떠다준 물을 마시니까 많이 가라앉았어요."

순희는 남은 물을 다시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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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상팔담 구룡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팔담이다. 이곳은 금강산 나무꾼과 선녀 전설의 발상지다. ⓒ 박상현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동생, 잠자코 있으니 심심한데 넷날 이야기해 주세요."
"무슨?"
"아무 얘기나 좋아요. 이렇게 잠자코 있으니까 춥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우울해져요."
"기럽세다. 내레 무슨 네기(얘기)를 할까? 누이, 금강산 구경을 한 적이 있수?"
"아니요. 남녘사람들은 금강산이 천하제일이라고 말만 들었지 그동안 갈 수도 없었잖아요."
"참, 기렇디. 올봄에 우리 농문학교에서 금강산으로 사흘간 원족(遠足, 소풍 또는 수학여행)을 갔디. 그때 안내원한테 들은 네기를 하디요. 금강산 구룡연 계곡의 상팔담과 만물상 가는 길에 있는 절부암 전설을 재미나게 들었디."

옛날 금강산에 한 나무꾼 노총각이 살았답네다. 어느 날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살레주어시오. 사슴은 그 은혜를 갚고자 그 노총각에게 한 가지 비밀을 몰래 알레주어시오.

"매일 밤마다 하늘의 선네(선녀)들이 금강산 구룡연 계곡 상팔담에 내려와 날개옷을 벗고 목욕을 한대요. 그런데 그 선네들은 날개옷을 닙지(입지) 않으면 하늘로 날아갈 수가 없답네다."

그래 노총각 나무꾼은 사슴이 말한 상팔담 옆 숲에 살그마니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레시오. 마침내 하늘에서 여덟 선네레 상팔담으로 내려온 뒤 서슴없이 날개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는 한 넌못(연못)에 한 선네씩, 여덟 선네레(선녀가) 발가벗은 몸을 넌못에 담그고 목욕을 하였답네다. 나무꾼은 사슴이 시킨 대로 그 가운데 한 선네의 옷을 몰래 감촤놓고는(감춰놓고는) 숲속에 몸을 숨겨시오.

목욕을 다 끝낸 뒤 일곱 선네들은 벗어놓은 자기의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습네다. 그런데 한 선네만은 날개옷이 없어져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발가벗은 채 연못가에서 울기만 했답네다. 그때 나무꾼이 슬그머니 나타나 그 선네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답네다. 기래 노총각 나무꾼은 그 선네를 부인으로 맞은 뒤 두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두 단란하게 잘 살았습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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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암(切斧岩) 나무꾼이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잊지 못한 채 날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도끼로 바위를 찍었다는 절부암이다. 만물상으로 가는 길섶에 있다. ⓒ 박도



기런데 사슴은 나무꾼에게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는 절대로 아내에게 날개옷을 감촸다는 녜기를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습네다. 하지만 나무꾼은 아내를 너무 사랑하고 믿었기에 그만 자기가 지난날 선네의 날개옷을 감촤두었다는 네기를 불쑥 했답네다.

그러자 아내는 날마다 그 날개옷을 보고 싶다고 나무꾼 남편을 몹시 졸랐답네다. 그날부터 나무꾼은 아내의 성화에 못 니겨(이겨) 몰래 감촤둔 날개옷을 아내에게 돌려줫답네다. 그러자 아내는 넷날 자기의 날개옷을 닙은 뒤, 두 아이를 낭팔(양팔)에 안고는 그만 하늘나라로 훌쩍 날아가 버렛습네다.


"내가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들은 얘기지만 동생이 해주니까 더 실감나고 재미있네요."

"기럿습네까? 기러타믄 내레 그 다음 녜기도 마자 하디요."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던 아내와 두 자식을 잃은 나무꾼은 그날부터 자기 입의 가벼움을 원망하며 울며지냇답네다. 그는 날마다 나무 지게를 지고 금강산 만물상 가는 길에 있는 절부암 바위에 올라가 나무를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신세 타령으로 나무하던 도끼로 바위를 내리 찍엇답네다.

날마다 하늘의 옥황상제님이 나무꾼의 그 지극한 모습을 내려다보구 어느 날 매우 가엽게 너긴(여긴) 나마지(나머지) 밧줄을 내레(내려) 주어시오. 그러자 마침내 나무꾼은 그 밧줄에 몸을 묶자 곧 밧줄은 하늘로 올라가디요. 기래서 나무꾼은 다시 아내와 자식을 만났답네다.

팔월 한가위

"아, 그 이야기가 그렇구만요. 나는 그 다음 얘기는 몰랐지요. 역시 하늘나라 옥황상제는 심지가 굳은 분이시군요."
"기럼요, 부부 인연이 굳구 진실하구 끈딜기믄 하늘까디도 이어디디요. 우리두 기런 배필이 됩세다."

준기는 품안의 순희에게 입을 맞췄다. 순희는 준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저승사자도 우리 얼굴을 익혔을 거예요."
"그렇다면 어여삐 너겨 느즈막히 데려 가겠디요."
"글쎄요."
"자, 누이. 이제 날이 어둑해요. 우리 그만 떠나요."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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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풍령 표지석과 노래비 ⓒ 박도

그들이 서로 부축하며 한밤중에 헐떡이며 이른 곳은 추풍령이었다. 순희는 그새 지치고 무릎도 바위에 부딪쳐 절름거렸다. 게다가 밤이 되자 산중 날씨가 차가워 몹시 떨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여름 홑옷을 입고 있었다. 추풍령 고개 마루를 넘기 직전에 등잔불이 빤히 켜진 한 외딴 집이 보였다.

"저 집에서 쉬어가요. 제가 부탁해 볼게요."
"그럽세다. 구미 각산의 별남 할멈이 인명은 재천으로 한 번 죽는다고 했디요."
"그런 마음을 가지면 편하지요.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인데."

순희가 문밖에서 주인을 불렀다.

"계세요?"
"……."
"계세요?"

한참 뒤에야 방안에서 대답했다.

"누고?"

그제야 방문이 뾰족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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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이 지붕도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가는 중 정차하는 동안 플랫폼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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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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