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 이 전장에서 죽어야 돼!"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40) # 11. 체포 ⑤

등록 2013.09.04 19:16수정 2013.09.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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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경인가도를 지날 때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마을사람들(1950. 9. 27.).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경인가도를 지날 때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마을사람들(1950. 9. 27.).NARA, 눈빛출판사

양심

남 대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야, 안 되가서. 이러다간 우리 셋 모두 당할 것 같아. 너덜은 총조차 없으니께 맞서 대적할 수도 없디. 지금부터 내레 멩넝한다. 내레 총을 가디고 밖으로 나가 산 아래로 후다닥 뛰어내레 가믄 토벌대 아새끼들이 나를 집중적으로 추격할 거야. 기때까디 동무들은 잠자코 요기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 아새끼들이 나를 추격하느라 산 아래로 모두 사라지믄 기때 산꼭대기로 튀어라."
"아닙네다. 대장님! 우리도 대장 동무와 항께 아래로 뛰겠습네다."
"야, 기건 말도 안 돼. 자살행위야. 기러구 셋 다 요기서 이대루 죽을 순 없어야. 배가 정원초과로 침몰할 때는 나이 순으로 먼저 뛔내리는 게 바른 순서고, 거게 사회의 정의야."
"안 됩네다, 대장 동무. 거(그) 총 이리 주시라요."

"내레 만주에서, 왜놈들이 물러간 뒤에두 장개석 군대와 수십 차례 전투를 치루구두 살아난 놈이야. 내레 설사 지금 죽는데도 하나도 억울치 않아. 내레 아들 둘, 딸 하나가 잇어. 기러구 내레 독전대장 하믄서 도망치려는 우리 조선인민군 동무들 수태 죽이거나 혼냇디. 내레 이 전장에서 죽어야 돼!"
"아닙네다. 대장 동무."
"사람은 죽을 때가 있디. 내레 요기서 죽어야 더승에 가서 갸네들을 떳떳하게 볼 수 있디. 내레 요기서 비겁하게 투항하여 포로수용소에 갈 수는 없어야. 기게 내레 최소한 낭심(양심)이고, 자존심이야."

다시 앞 계곡에서 토벌대의 확성기가 울렸다.

"너희들은 독안 든 쥐다! 너희들 생명이 아까우면 총을 버린 뒤 손을 들고 빨리 뛰쳐나오라. 이제 약속시간은 지났다. 다시 마지막으로 3분간 시간을 주겠다."

금세 약속시간이 지났다. 다시 확성기 소리가 났다.


"지금 즉시 동굴밖으로 나오라.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하나, 둘, 셋  …."
"야, 개수작하디 말라 쌍!"

남 대장은 동굴 안에서 맞받아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다시 총탄이 빗발치듯이 동굴 언저리를 때렸다.


희생

"야, 이 국방군 괴뢰새끼들아! …"

남 대장은 그 말을 소리지르며 후다닥 동굴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동굴 언저리를 둘러싸던 토벌대들이 남 대장을 추격하며 총을 마구 난사했다. 남 대장은 계곡 아래로 비호처럼 뛰어내려 가면서도 순간 순간 뒤돌아보며 따발총을 난사한 뒤 다시 뛰어내려갔다. 그 총에 토벌대들이 여러 명 쓰러졌다. 대부분 국군 토벌대들은 남 대장을 추적했다.

마침내 남 대장은 넙적다리에 토벌대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한 아름이 넘는 전나무에 몸을 숨긴 채 추적해 오는 토벌대를 조준 발사했다. 그의 사격술은 대단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신묘한 빨치산 사격술로 토벌대들 예닐곱이나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는 중과부적으로 온몸에 총알을 벌집처럼 맞은 채 땅바닥에 큰 대자로 엎드렸다.

"사격 그만!"

토벌대장이 명령했다. 곧 추적 토벌대가 남 대장의 사망을 확인하고는 거적으로 둘둘 말아 들쳐메고는 동피골 어귀로 내려갔다. 잠시 후 동굴 언저리가 조용해지자 준기와 윤성오는 동피골계곡 능선을 타고 호령봉 정상으로 줄달음을 쳤다. 윤성오는 다리에 파편 상을 입은 탓으로 다소 절름거렸다. 그들이 숨을 헐떡이며 막 호령봉 칠부 능선쯤 오를 때 길목 바위 뒤에서 갑자기 국군토벌대 다섯 명이 튀어나오면서 총구를 그들 가슴에 겨누었다.

"야, 손들어!"
"야, 이 괴뢰군 새끼들아! 손 번쩍 들어."

준기와 윤성오가 꼼짝없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지."
"우리가 너희들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토벌대 엠원소총 개머리판이 두 사람을 마구 짓이겼다.  그때 준기는 정신을 잃었다.

 오대산 동피골 능선(2013. 8. 5.).
오대산 동피골 능선(2013. 8. 5.).박도

독종

준기와 윤성오가 임시포로수집소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날 아침이었다. 토벌대장은 준기와 윤성오를 불러내고는 화장실 뒤편에 거적으로 덮어둔 시신 곁으로 데리고 갔다. 토벌대장은 거적을 벗겼다. 남 대장은 온몸에 벌집처럼 총탄을 맞아 얼굴도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야, 이 놈이 누구야?"
"……"
"너희들 이 놈처럼 죽고 싶어. 이미 상황은 끝난 거야."

토벌대장이 군화발로 준기와 윤성오의 정강이를 번갈아 찼다.

"남진수 중사입네다. 3사단 독전대 대장이엇디요."

윤성오가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틀림없나?"
"네, 맞습네다."

준기도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독전대장 새끼는 다르군. 이 새끼 총에 내 부하 세 명이 전사했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어. 끝까지 독전대장 이름값은 하고 죽었군. 내 부하들을 생각하면 이 새끼 시신을 총으로 갈겨 가루로 만들고 싶어."

토벌대장은 이를 뽀득뽀득 갈며 군홧발로 남 대장 시신을 걷어차고는 거적을 덮었다.

 학살 현장에서 마대에 담긴 가족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한 아낙네(함흥 덕산광산, 1950. 11. 13.).
학살 현장에서 마대에 담긴 가족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한 아낙네(함흥 덕산광산, 1950. 11. 13.).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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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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