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아주 부드럽게

[서평]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등록 2013.08.14 10:43수정 2013.08.1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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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막말'이 있느냐고 분노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히틀러는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했고,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은 자국민 200만 명을 학살했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는 지난 10일 <한겨레> 토요판 '미국은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 중' 기사에서 미국은 "19세기 말까지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인디언 원주민 30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필리핀 독립전쟁이었던 필리핀-아메리카전쟁(1899~1902년)에서 100만명 웃도는 필리핀 시민을 학살했다"고 지적했다.


"한 사람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명 죽음은 통계"

두세 사람이 살해 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언론들은 이를 집중보도하고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찰은 질타 받는다. 그런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자살폭탄이 터져 수십 명이 죽어도 짧게 보도될 때가 많다.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아직 진행되고 있지만, 600만 명을 학살한 것에 비하면 약하다. 미국이 자신들 학살에 대한 책임을 졌던 적이 있었는가? 없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명 죽음은 통계라는 스탈린 말을 무조건 반박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남 탓할 처지가 아니다.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제주 4·3사건, 거창사건, 노근리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등. 그나마 이들 사건은 잘 알려진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일어난 학살사건 중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건도 많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사계절
한국전쟁의 정치사회학을 시도하며 민중의 체험으로 전쟁의 의미를 캐물은 <전쟁과 사회>를 썼던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쓴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사계절 펴냄)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지독한 인간성 말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그답게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통계'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점을, 국가권력이 자행한 학살을 철저히 조사하고, 다시는 이같은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양심'을 가진 학자와 지성인으로서 호소한다.


"학살이나 국가폭력은 마치 암세포와 같이 그것과 전혀 무관한 구성원들의 정치·사회 의식과 도덕적 기반을 좀먹어 들어간다. 그래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사회에 복귀시키고, 그 사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에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7쪽)

"학살과 국가폭력은 암세포"


그는 "'기억의 정치'는 한 국가나 사회의 헤게모니, 국가 정체성의 문제이자 사회의 질서, 법과 도덕의 기본"이라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국가를 만드는 일과 맞먹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권력이 자행한 학살을 바로잡는 일이 나라를 세우는 일과 맞먹는다는 말은 국가 권력이 인간존엄성을 결코 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구세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 청산을 추진하자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이라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록 '누더기'로 출발하자 군·경 출신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 끝자락이었던 2008년 1월 30일에는 뉴라이트연합 등 90개 단체가 연합해 만든 '국정협'(대한민국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이 "6·25전쟁 중에 발생한 양민 희생자 사건을 왜곡하면서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반국가 행위자를 두둔한 점을 바로 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국군, 경찰을 학살자로 모독한 사진 전시회 즉각 철회", "과거사위 발표 민간인 희생사건은 왜곡 날조된 엉터리다", "좌파정권 산물 과거사정리위 정리하라"고 외쳤다.

노무현 "국가가 자행한 폭력" 사과... 수구세력 "왜곡날조"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을 한 달 앞둔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 영상 메시지를 통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위를 '국가'를 대표해 사과했다. 이에 앞서 제주4·3사건에 대해서도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그럼 노무현 대통령과 수구세력 중 누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했을까? 이럴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역시 대한민국 헌법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했다. 국가는 그 어떤 행위로도 국민의 존엄성을 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기 학살은 인간존엄성을 훼손한 것이다. 당연히 국가 이름으로 사과해야 한다.

예로든 헌법이 1987년 개정 헌법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럼 제헌헌법을 보자.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했고, 제9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아이까지 학살... 대한민국 헌법 부정

'문경 석달동 학살사건'이란
문경 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24일 정오, 공비 토벌 명목으로 수색 정찰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명이 경북 문경군 산북면 산간 마을 석달동을 지나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마을 주민 전원을 불러내 사냥 연습하듯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다. 당시 학살로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1.09.27 <시사인> "어린아이도 사냥 연습하듯 학살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학살은 헌법을 무시했다. 1950년 11월 8일 전북 남원 대강면 강석마을 주민 70명은 국군에게 총과 칼로 학살당했다. 그들은 "무학이거나 국졸이었으며,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렁이 벽촌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아이들이 학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김동춘은 경북 문경 석달동 학살 사건 추모비에 이런 시를 남겼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들. 위 왼쪽 차량적재함에 '논산읍' 글자가 보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끌어내려지고 있다. 위 오른쪽 길게 파놓은 구덩이 둔덕 위 재소자들을 엎드리게 하고 등 뒤에서 헌병들이 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시신들을 정리하고 있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들. 위 왼쪽 차량적재함에 '논산읍' 글자가 보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끌어내려지고 있다. 위 오른쪽 길게 파놓은 구덩이 둔덕 위 재소자들을 엎드리게 하고 등 뒤에서 헌병들이 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시신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계절

"산 넘어 넓은 세상 머물 곳 찾아/구천 떠도는 어매 아배 기다리며/석달 마을 산 모퉁이에/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울고 있네//아가들아 아가들아/ 이름 없는 아가들아/ 피 묻은 아베 조바위 쓰고/ 눈물 젖은 아베 고무신 신고 놀지/ 그 옛날 이야기 말해주렴/ 지나가는 길손이 발 멈추거든// 아가들아 아가들아 오늘 밤은/ 어매 품에 안겨 아베 등에 업혀/ 백토로 사라지기 전 그 옛날처럼/ 좋은 세상 꿈꾸며 잠들어라 - <이름 없는 아기 혼들>'석달동 양민 학살에 때 참살된 아기들을 생각하며'"(129쪽)

아이들을 학살한 것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이들을 학살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 군경을 모독한 것이 되는가. 오히려 아이들을 학살한 것이야 말로 대한민국 군과 경찰을 모독한 일이다.

김동춘은 "과거 청산은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죽음과 고통을 직시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삶은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며 "그것은 과거의 억울한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생명의 가능성을 묻는다"고 했다. 국가권력이 자행한 학살을 제대로 조사하고, 사과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중간에는 한국전쟁기 학살 현장과 유골 발굴을 담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1950년 7월-8월 대구 형무소 재소자와 경산·청도 지역보도연맹원 집단학살사건, 1950영 7월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 등에 구금된 청주·청원 지역보도연맹원 학살사건, 1951년 2-3월 경남 산청 외공리 학살사건 등등이다.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더 고통스러웠던 지난 60년

특히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최소 1800여 명 이상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 등이 헌병대와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숨진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사건을 담은 사진 3장에서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이게 대한민국 군과 경찰이 자행한 학살이었다, "빨갱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은 자도 빨갱이였고, 아니 죽은 이보다 더한 '산송장'이었다. 

"한국전쟁기에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폭도' 혹은 '빨갱이'였고, 살아남은 가족도 '빨갱이'였다. 지난 60여년 동안 피학살자들의 가족들과 기적적인 생존자들은 '산송장'이었다. 우리 사회는 산송장이 이웃에 널려 있는데 그 존재를 외면하면서 살고 있다. 도대체 그런 국가나 사회는 어떤 곳일까?"(59쪽)

김동춘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좌익 관련 피학살자들과 가족들을 세 번이나 죽였다고 주장한다. "학살 자체가 첫 번째이고, 19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폭력으로 틀어막은 것이 두 번째이며 그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하여 1980년대까지 연좌제로 묶어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세 번째"라고. 이 말 앞에서 "난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할 학살

이어진 그의 글 "특히 세 번째 학살은 정부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 언론, 사회, 이웃 사람들의 협력과 공모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침묵했고, 또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은 빨갱이였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자신의 묵인과 방관을 정당화했다"는 말에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는 군경과 수구기득권만 학살에 책임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번째 책임에 나 자신도 포함됨을 비로소 알았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는 "제주도의 서늘한 풍광 아래에서 검은 핏자국을 남기며 사라져간 사람들, 토벌작전·처형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하게 살해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반추"하고 "국가와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억압되어 있던 학살의 비밀을 끄집어내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학살의 기억을 되새기고자"한다. 그러기에 불편하다. 왜 난 그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수구세력처럼 "전쟁통에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인민군들도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억울한 죽음과 비통한 슬픔을 남긴 전쟁의 실체와 진실"을 밝힐 수 있고, "원통한 죽음은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므로.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지난 60년을 되풀이 할 것이다. 학살을 제대로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에 지금도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 아주 부드럽게.

"국가권력, 민주화 이후 부드러운 학살 자행"

"나는 민주화 이후에도 부드러운 방식으로 학살이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안 기관의 위법과 권력 남용, 도시 재개발 철거 현장에 난무하는 폭력과 노동 현장의 구사대 폭력, 빨갱이라고 덧칠을 해서 특정인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나는 학살은 전쟁기에 나타나는 매우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폭력으로 정치적 저항 세력을 완전히 무력화하거나 제거하는 권력 행사의 한 특수한 형태라고 보았다."(30쪽)

쌍용자동차 노동자 23명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들과 호흡하지 못한다. 현대자동차 최병승·천의봉씨는 290여일 동안 저 높은 하늘에서 싸웠다. 갑을 관계는 또 어떤가?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김동춘 표현처럼 "부드러운 방식으로 학살이 지속"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김동춘이 던지는 마지막 호소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기억하자.

"새롭게 발굴되고 해석된 역사는 죽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현재의 지배구조의 기원을 고발해주는 문서다. 이 성과가 단순히 피해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것, 시민의 것이 되고 또 인류의 것이 될 때, 우리는 인권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446쪽)
덧붙이는 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김동춘 지음 ㅣ 사계절 펴냄 ㅣ 25000원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 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

김동춘 지음,
사계절, 2013


#한국전쟁 #학살과 폭력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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