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와 맞짱... 작은누나는 만수받이 전문입니다

[공모-가족인터뷰] 내 인생 도우미 작은누나, 이젠 대나무처럼 살아줘

등록 2013.08.21 16:04수정 2013.08.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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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남매 초등학교 시절 작은누나와 함께 배 위에서 한 컷!
선상 남매초등학교 시절 작은누나와 함께 배 위에서 한 컷!황왕용
요즘 청소년에게 '누나'는 상당히 귀찮은 존재라고 한다. 심지어는 가정 내의 비교대상자, 경쟁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누나'라는 이름 때문에 만수받이하는 희생적인 누나가 여기 있다. 네 살 터울의 누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혼냈고, 내가 챙기지 못한 준비물을 내게 주어 대신 벌을 받기도 했다. 생일이 빨랐던 나는 누나와 세 학년 차이가 났고,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이 학교를 다녔다.

우리가 다니던 시골학교에서는 여름이 되면 전교생이 학교운동장 잡초를 뽑는 일이 잦았다. 담임선생님은 한 아름 뽑아 검사를 맡게 지도한 후 나무그늘에 앉아 있었다. 난 잡초를 뽑지 않고 누나가 뽑은 잡초를 건네받고 일찌감치 쉬었다. 누나는 나의 몫까지 잡초를 뽑았다. 잡초를 뽑아도 다음날이면 잡초는 더 많이 자라 있었다. 여름에는 언제나 작은누나가 나의 잡초를 뽑아주었다.

잡초가 빨리 자라는 것처럼 3년이라는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나는 학교에 홀로 남게 되었다. 누구도 내 잡초를 대신 뽑아주지 않았고,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았으며,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혼내주지 않았다.

공부 잘했던 누나가 상고 진학 택한 이유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누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순간 평범한 우리 가정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가끔 늦는 경우는 있었지만 외박을 하지 않았던 아빠의 외박이 잦아졌고, 엄마는 말수가 점점 줄었다. 단독주택에 살았던 우리는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야했다.


1997년, 그 시절을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것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현실은 달랐다. 아빠가 들어오는 날이면 다섯 명이서 기지개를 켜기도 힘든 좁은 방에서 자야 했고, 집에 욕실이 없어서 잘 씻지도 못했다. 그런 현실에서 막내인 내가 했던 것은 불평과 현실 도피뿐이었다.

하지만 작은누나는 달랐다. 반에서 5등 안에 들었던 누나는 갑작스럽게 상고 진학을 선택했다. 엄마는 누나를 말렸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입학금, 납부금을 내는 시절이었기에 큰누나까지 포함해서 세 명의 학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안 작은누나는 장학금을 받고 상고로 진학했던 것이다.


"내가 순천여중 3학년 재학할 당시 순천은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으로 성적과 시험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시절이었지. 담임선생님은 당연히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할 거라고 여겼는지 상담 후 다시 고민해 보라고 하셨어. 얼마간 고민 후 실업계 고교로 진학하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그때 당시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고 위로는 언니, 아래로는 남동생도 있기에 실업계 고교에 가서 바로 취직하고픈 마음이 컸지.

그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내 결정을 존중해 주셨고, 고교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셨어. 물론 대학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내가 벌어서 갈수도 있고 여의치 않으면 야간대학이라도 진학하리라는 꿈은 항상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어.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자격증도 열심히 따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학교에서 임원도 맡아가며 나름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렸지. 덕분에 3년 내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서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고교생활을 했었다. 가끔은 장학금을 생활비에 보태서 쓰기도 했어." 

누나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유통회사 지방지점에 취직했지만 생각보다 보수가 적었다. 첫 1년 동안 월급은 50만 원이었고, 경력이 쌓이면서 5만 원씩 늘었다. 하지만 누나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불평을 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누나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코트를 사면서도 미안했어..."

시험만 잘 봤던 나는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정말 철이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교복 물려 입기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친구들은 부유한 집에서 다들 신경 쓰는 아들이었기에 유명 메이커 교복을 입었다. 교복을 살 돈이 없었던 우리집은 수소문 끝에 10년 전 졸업생의 교복을 얻어올 수 있었다.

교복은 세월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입고 다녀야 했던 난 창피했다. 저절로 어깨가 처지고 고개가 숙여졌다. 그럭저럭 잘 버텨냈지만 겨울엔 정말 추웠다. 교복 위에 코트를 입고 다니던 친구들은 따뜻해 보였지만, 나는 교복만 입고 다녀야 했다.

"교복이 이게 뭐야? 이러고 어떻게 공부를 해? 요즘에는 정말 추워서 교복만 입고 다니는 애들도 없어. 다 코트 입고 다니지. 이럴 거면 내가 뭐하러 공부를 해?"

지금 생각하면 얼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운 언사다. 내가 투정을 늘어놓은 다음날 작은누나는 월급의 1/4 정도 되는 가격의 코트를 종이가방에 담아 무거운 퇴근을 했다.

"내가 취직을 했을 당시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너는 고1이었어. 취직 초기엔 급여가 너무 적어 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나… 1년이 지나니 목돈도 생기고 내가 그간 고생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어.

그때 언니도 수시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는 등 힘든 대학생활을 보냈지만 등록금이 부족한 적이 있었어. 차마 나에게는 말을 못하고 고민을 하는 것 같았지. 나는 큰돈은 아니더라도 벌고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언니의 한 학기 등록금을 내준 적이 있었어. 언니는 무사히 졸업을 했고, 그 후로 본인 앞가림은 물론 가족들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준 거 알지?

이제 남은 건 너뿐이었지. 남들처럼 입시 설명회를 다닌 적도 학원이나 과외를 한 적도 없고, 일탈을 일삼지도 않았으며 사춘기가 있었나 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어. 그런 너와 매일 함께 등교한 거 기억나? 너가 다니던 학교를 지나야 버스를 탈 수 있었잖아? 너는 불평불만을 했다고 말하지만, 너도 정말 많이 참았지?

매일 등교할 때마다 빛바랜 교복이 눈에 걸렸고, 친구들의 유명 메이커 신발, 가방이 내 눈에 들어왔어. 너에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겨울에는 교복만 입고 여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너가 안쓰러웠어. 너가 말하기 전에 코트를 사줬어야 했는데, 코트를 사면서도 미안했어..."

누나에게 닥치는 어려운 일들... 누나, 이젠 대나무처럼 살아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매일 같이 빚쟁이가 집으로 찾아 왔었다. 빚쟁이들은 안 그래도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우리 집 인구밀도를 더 높여주었다. 인구밀도 수치가 떨어질까 걱정되었는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돌아가면서 밤 12시까지 기다리다 집에 갔다.

"제발 좀 가세요. 저희도 잠 좀 자게요."
"돈 가지고 와. 그럼 오라고 해도 안 와."
"꺼지라고요."

몸도 피곤하고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 난 이렇게 대들었다. 그러다가 신발로 머리를 맞았다. 설움이 복받쳐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럴수록 난 점점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 신세가 되었다. 한번은 퇴근한 누나가 나 대신 빚쟁이들과 한바탕 심하게 싸워 물리친 적이 있었다. 작은누나는 이렇게 나를 만수받이했다.

"너는 만수받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은 틀렸다. 만수받이라는 뜻이 아주 귀찮게 구는 말이나 행동을 싫증 내지 않고 잘 받아주는 일이라고 했지? 난 너가 귀찮지도 않았고, 내 곁에 주어진 일들이 짜증나지 않았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순간을 그냥 받아들였어. 만약에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이렇게 멋지게 세상을 대하는 누나에게 왜 매일 힘든 일만 일어날까? 몇 해 전 누나가 결혼을 했고, 조카도 낳았다. 하지만 조카는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호흡곤란이 와 급하게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고 수술을 두 차례나 했다. 핏덩이 같은 신생아가 10시간이 넘는 수술을 2번이나 하다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누나는 산후조리는커녕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은 지 보름 만에 병원에서 아이를 간병하느라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다고 한다. 그 순간에도 군대에 있던 나의 전화를 받으면 항상 밝은 목소리였다.

작은누나는 나에게 아름드리 나무였다. 그늘이 되어 주었고, 휴식을 주었다. 열매를 주기도 하고, 선선한 바람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제는 남에게 쉼을 주는 아름드리 나무 대신에 대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누나의 삶에도 휴식처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공모-가족인터뷰>
#만수받이 #작은누나 #가족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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