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곱 살 때 할머니 집인 김해 가는 길. 그때는 앞으로 펼쳐진 급커브가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칠 줄 몰랐다.
황왕용
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김해로 가는 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김해는 2번 큰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매해 명절마다 찾아갔지만, 분위기가 어색해 선물만 두고 밥 한 끼 먹지 않고 다시 집으로 오는 게 전부였다. 어색했지만, 해마다 찾아간 김해행 발길을 끊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추석 당일, 짐을 싣고 김해로 가던 도중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와 큰 사고가 났다.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아버지는 1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나도 두세 달씩 입원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아버지는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다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김해에 가지 않았다. 아마 할머니에게 또 버림받았을 것이란 생각에 무섭고 억울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세 살 때 혼자가 됐어. 할머니는 새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고, 기억은 없지만 육촌당숙이 세 살 때부터 나를 키웠다고 했지. 육촌당숙이 나를 받아줬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풀을 몇 지게씩 해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어. 사실 초등학교를 온전히 다니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지.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새경을 받으며 남의 집 일을 했어. 1년 간 하루 4시간씩 자고 일을 해도 쌀 세 가마니가 전부였지. 그렇게 2년 동안 일을 했더니 돈이 조금 모였지. 새경을 모으고, 나무를 조금씩 팔아 돈을 모았어. 그랬더니 너희 할머니가 찾아오신 거야. 학교를 보내준다고 남원으로 데리고 가셨지. 남원에서는 버림받기 전에 내가 그곳을 떠났어.""나는 엄마 아빠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라"나는 어렸을 때 키가 작은 아버지를 부끄럽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내 키가 꼭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운동회에 오지 않길 바랐고, 비가 오는 날에 걱정스러워 데리러 오는 날에는 아버지를 멀리서 보고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보다 키가 작았다. 그게 마냥 부끄러웠다. 그런데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키가 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4시간씩 자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일했던 나이 때 나는 매일 늦잠을 자며 어머니를 괴롭혔고 매일 우유를 독차지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아버지>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이 시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아무런 이유 없이 비난했다. 친구들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나는 열을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앞에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기 민망해진다.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것 같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내 삶에 대입해 본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어릴 적 나는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몹시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원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할머니를 만난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는 10년을 떨어져 지낸 어머니와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게 좋았을까. 학교를 보내준다는 말보다 분명 엄마의 냄새가 그리워서 따라갔을 것이다.
"엄마…? 사실 나는 엄마 아빠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몰라. 경험해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어서 너희들에게는 무심한 아빠 못난 아빠였을 게다. 그렇지? 내가 16살 때였을 거야. 한 아주머니가 엄마라면서 나를 남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지.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엄마라니? 그때 내게도 엄마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냥 엄마라는 말이 좋았고, 냄새가 좋았어. 그런데 남원에 갔을 때 너희 할머니는 나무를 해오라고 시켰어. 3년 동안 실컷 일을 시켰지. 40리 길을 걸어가 나무를 하고 돌아와 저녁에는 나무를 팼지.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3시에 15리 길을 걸어 남원 장에 가서 나무를 팔고, 집에 와서 아침 먹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갔어. 그렇게 나무를 한 지게를 팔면 200원씩 받았어. 그 돈을 조금씩 모았지. 그리고 나무를 하러 가지 않은 날에는 논일을 했어. 새 아버지는 너희 할머니보다 25살이나 많은 사람이었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나한테만 일을 시켰지. '엄마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이럴 거면 엄마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다시 순천으로 내려왔지. 남원에서 모아둔 돈으로 학교를 다녀볼까 생각했는데 쉽지 않더라고. 차라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밭을 샀지. 밭일도 하고, 소 한 마리를 사서 달구지에 똥장군 10개를 들고 다녔어. 그때만 하더라도 똥장군 지고 다니는 일이 꽤 쏠쏠했지. 한 통에 50원씩 받았으니 하루에 500원씩 벌었지. 꽤 큰돈이었어. 그때 쌀 한 가마니가 1500원 정도 했을 거야. 엄청 열심히 일했어. 몇 년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등에 똥냄새가 가시지 않도록 했지. 꽤 돈을 많이 모았어. 밭을 더 샀지. 그 밭만 떼이지 않았어도…."아버지 다른 동생까지 남겨두고 다시 떠난 할머니내가 태어나서 보고 느낀 우리 집은 '부자'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자였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차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 차가 있었고, 차 속에는 전화기도 있었다. 집에는 일하는 이모도 있었다. 그 모든 풍요로움이 일상이었기에 고마운지 몰랐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건축일을 하셨는데, IMF 전까지 상당히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큰돈을 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