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을 이런 걸 다 주요?"

[섬진강변 두계마을 이야기 8] 장날, 서로 마음을 나눴습니다

등록 2013.08.28 11:20수정 2013.08.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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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달력을 보니 장날이다. 아직 농사꾼이 못 되어서 일에 매이지 않으니 '장에나 가볼까'하고 궁리를 한다. 아침에 콩밭 한 고랑 풀을 맸으니 오늘 일은 한 셈이다. 딱히 살 것은 없지만 날도 보슬 비가 내리고, 기분도 꾸물해서 장바람이나 쐬어보려는 요량이다.


a  곡성장

곡성장 ⓒ 김영희


'장에 가는데 뭘 타고 간다?' 읍내까지 약 10km. 나의 '아장아장'(다마스 별명)이 있긴 있다. 하지만 우르르 혼자 몰고 가기에는 아깝다. 군내버스도 다니긴 한다. 다마스를 몰고 가는 것이나, 버스를 타고 가는 거나 드는 돈은 똑같다.

버스 타려면 30분 정도 걸어 나가야 한다. 동네를 지나 개울 따라 논 따라 내려가다가 섬진강을 건너 언덕 위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것인데, 나는 이 그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걸 좋아한다. 다만 찻길 옆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다. 

'에라, 누구 장에 갈 사람이 있으면 다마스를 몰고 가고 아무도 없으면 버스 타고 가야지.' 이렇게 작정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가본다. 마침 탑골댁 할머니가 혼자 앉아있다.

"장에 안 가실라요?"  
"나 빗지락(빗자루의 전라도 방언) 살 것 있어도 통 못 샀는디, 가볼까."
"또 누가 안 가실랑가요."
"통 사람이 없어. 다 일하러 나가 불고. 그럼 좀 지다려."

할머니는 옷 갈아입고 온다고 총총 집으로 향하신다. 지팡이 짚고 꼬부랑 걸음으로. 할머니를 태우고 동네를 나서는데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힌 큼직한 '키'가 걸어온다.


"장에 갔다 오셔요?" 
"잉."

키 밑에서 몸이 반이나 꼬부라진 채 대답하는 이는 전 이장댁 옆에 사는 그의 작은어머니다. 에구 아깝다. 미리 알았으면 장에 같이 갈 것을.


"얼마 줬소?"

탑골댁 할머니가 물어본다.

"6만 원. 작은 놈은 3만 인디 힘이 없드만. 이놈이 짱짱해." 
"그라먼. 6만 원은 줘야해." 

어렸을 때 보고는 그동안 쓴 일도, 본 일도 없어서 이제는 유물이 된 줄 알았던 '키'를 이 동네에서는 아직도 장에서 구입해 머리에 이고 온다. 신기하다. 하기야 도시에서는 쓸 일도, 볼 일도 없는 낫을 나는 여기에 와서 세 개나 샀다. 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여가 장이 있었을 때는 좋았는디."

읍내로 들어서는 커브를 돌자 할머니가 옛날 장터를 가리킨다.

"새로 생긴 데는 넘의 장 같어."  

몇 년 전 들렀을 때는 옛 장터에 장이 선 것을 봤는데, 그 사이 곡성장을 옮겼다. 큰 길 건너 넓은 장소로 옮겨 주차장도 만들고, '섬진강문' 라는 현판이 붙은 근사한 문도 만들고, 그 안에는 넓은 판을 벌였다. 

a  섬진강문 현판도 붙어있다.

섬진강문 현판도 붙어있다. ⓒ 김영희


그런데 어쩐지 짜임새가 없어보이고 좀 어수선한데다 휑한 느낌이다. 문득 이탈리아 그레베라는 작은 마을에서 본, 우리로 치면 장과 비슷한 광경이 생각난다. 가운데에 작은 광장이 있고 그 광장을 빙 둘러서 작은 가게들이 연이어 있어 한바퀴 돌게 되는 형태였는데, 저마다 특색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도 이왕 돈을 들여 새 장터를 만들려면 이렇게 만들면 어땠을까. 원형으로 빙 둘러 가게가 들어서고, 가운데 공터는 일종의 작은 광장이 되는 그런 형태. 광장에는 나무와 화초가 있고, 간이 식당과 먹을거리 파는 가게도 있으면 좋겠다. 때로는 품바 같은 작은 공연도 할 수 있어 흥청대는 분위기도 나는, 그런 형태의 장을 만들었으면 어떨까.

공간 크기와 돈 들인 규모를 보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아쉽다. 전체를 시멘트로 발라 삭막한 분위기를 연출한 점도 안타깝다. 그래도 이나마도 전통장이라고 관광객들이 오고 도시냄새 풍기는 차림들이 제법 눈에 띈다.

먼저 할머니의 빗지락을 사고 나자, 이제 장터 가운데 팥죽집에서 팥죽 한 그릇 먹었으면 딱 좋겠다.

"할머니 팥죽 한 그릇씩 먹읍시다. 제가 사드릴게요."
"집이 먹어. 나는 점심 금방 먹어서 배불러. 타올이나 사야 쓰겄다."
"그럼 도로 이리로 오셔요 잉."

나는 과일 몇 가지 사고 나서, 팥죽집에서 팥칼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사실 나도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빈 그릇에 반을 덜어놓고 먹고 있자 할머니가 오더니 검정비닐 속을 보여준다. '이태리 타올' 세 개와 삶은 옥수수 세 개가 들어있다.

a  팥죽 반그릇씩

팥죽 반그릇씩 ⓒ 김영희


"밭에 옥수수 없어요?"
"아직 안 익었어. 나 하나 먹고 집이 두개 먹어."

아마 차 탄 값으로 나 주려고 일부러 삶은 옥수수를 산 모양이다.

"이것 하나 가질라요? 내가 이것을 언제 다 쓰겄어?" 
"저는 타올 안 쓴디요. 아니 집에 많이 있어요."   
"그래?" 
"우선 이 팥죽 반 그릇 잡수셔요. 얼마 안 된께요." 

나는 붕어빵도 2000원 어치 샀다. 이거면 동네 사람들한테 인심을 쓸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 동네 초입에 이강진 어르신과 부녀회장 바깥 어르신이 앉아 계신다. 섬진강 지킴이를 하느라 두 분이 녹색 조끼를 입고 늘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붕어빵을 하나씩 드린다.

"뭣을 이런 것을 다 주요." 
"아. 아무것도 아니어요. 장에 갔다 오니라고요." 
"잘 묵으께요 잉."

참말로 아무 것도 아닌 붕어빵 하나로 생색내는 내가 알량해 보인다.

a  섬진강 지킴이 하는 우리 마을 어르신

섬진강 지킴이 하는 우리 마을 어르신 ⓒ 김영희


또 인심 쓸 사람없나? 길에는 아무도 안 보인다. 날은 그 새 해가 나서 다들 논으로 밭으로 하우스로 간 모양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마을회관 사무장도 주고 그 뒤에 혼자 사는 송정댁 할머니에게 갖다 드리면 된다.

"오늘 나땜시 돈만 썼네. 팥죽 사느라고." 
"뭣을요, 제가 다 묵었는디요. 요 붕어빵도 한나 잡수셔요 잉." 
"나 배부른디."

날이 개서 해가 쨍 난다. 장 나들이 한 번 잘 했다.
#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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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두계마을에서 텃밭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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