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기록한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61) #16. 맥아더기념관 ③

등록 2013.10.11 16:12수정 2013.10.1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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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직후 서울 남쪽 한강 유역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1950. 6. 29.). ⓒ NARA, 눈빛출판사


맥아더기념관

우리가 맥아더기념관 아키비스트에게 한국전쟁 사진파일을 요청하자 그가 여러 상자를 내놓았다. 그 상자에는 맥아더의 전 생애를 살필 수 있는 사진자료들로 가득했다. 나는 수천 장의 사진자료 가운데 한국전쟁 관련 사진만 가려 골라 뽑은 뒤, 고동우의 캡션 번역을 들으며 다시 사료가 될만한 것만 골라 스캔했다.


한국전쟁 발발하자 맥아더가 도쿄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최전선 시흥 일대를 시찰하는 장면(29. Jun. 1950),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장면(15. Sep. 1950), 중앙청 서울수복기념식에 맥아더가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한 장면(29. Sep. 1950),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가 투르먼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15. Oct. 1950), 신의주 상공에서 맥아더가 적정을 살펴보는 장면(24. Nov. 1950), 만주 폭격을 주장하다가 투르먼 대통령의 해임 명령을 받고 맥아더가 도쿄 하네다 공항을 떠나는 장면(16. Apr. 1951) 등 90여 점을 스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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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 무기들(1951. 5.) ⓒ NARA, 눈빛출판사


또, 별도로 된 앨범에는 한국전쟁 전에 일어났던 좌익사범들의 체포와 처형장면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고 선생은 아카비스트에게 문의한 뒤, 나에게 이 앨범은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 군사고문단 정보담당 한 주임상사가 이 사진들을 수집하여 만든 것으로, 영구보존을 위해 맥아더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가르쳐주었다.

그 앨범에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정 및 정부수립 직후의 한국 내 게릴라들을 체포한 장면과 그들을 처형한 뒤,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로 보내자 육군간부들이 이를 살펴보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그 장면들이 너무나 잔인하고 처참하기에 그 앨범을 펼쳐보는 동안 모골이 송연하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들 사진을 모두 스캔하고 싶었지만, 담당 아키비스트는 그 앨범에 수록된 사진은 다른 사진과는 달리 모두 유료라 해, 주머니가 얄팍한 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몇 컷 담는 걸로 만족했다.

사진 검색이 끝나자 오후 4시로 서둘러 맥아더기념관을 떠났다. 우리는 맥아더기념관에서 너무나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본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짐승도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몇 해 전 하얼빈 근교 731부대에서 일본군들이 인간생체 실험 장면을 사진과 모형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사람으로 태어난 게 부끄러웠다.

"맥아더기념관에서 미 군정기간 동안 좌익사범을 처형하여 그들 목을 잘라 박스에 담은 사진 앨범을 보니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인의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낸 거나 다름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을 총살하고, 목을 자르고, 그걸 상자에 담아 상부로 보낸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을 테지요."


나는 울먹거리며 고 선생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그 장면을 미군 고문관들이 지켜보고 있더군요. 역사는 돌고 돌지요. 그런데 후진국으로 미개한 나라일수록 이런 역사를 감추거나 일부러 외면해요. 그러다가 보니까 잘못 기록한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망국 원인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계속해서 친인척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탓이겠지요."
"그럼요. 그것은 한국 사회의 정의감 부족이요, 인문 소양이 무지한 까닭이지요. 그런데다가 그런 비리의 주범들을 올곧게 기록치 않고 '구국의 영웅' 등으로 미화한 까닭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도 그대로 따라 하는…. 마치 부나방이 불에 타죽는 동족을 보고도 그대로 불에 뛰어드는 하등 동물처럼."

"그런 탓으로 어느 작가는 북쪽은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사회요, 남쪽은 부정부패로 악취가 가득한 사회로 그렸더군요."
"아주 핵심을 찌른 작품이군요. 우리가 아카이브에서 사진으로도 봤지만 정전협정 후 포로 송환 때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삼국을 택한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제삼국으로 간 그들도 편치 않았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나라가 분단되거나 망했을 때, 분단 백성이나 망국민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지요."

고동우는 그 말에 이어 우리나라 분단의 근본 원인은 조선의 망국에 있었고, 조선의 망국 원인은 지배층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있었다고 재삼 강조했다.

"저도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기 전에 매천 선생의『매천야록』을 읽어보니까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더군요. 반년이나 밀린 군인들의 급료를 양곡으로 지급하는데, 탐관오리들이 거기다가 겨와 모래를 섞는 등 장난질을 하니까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지요. 그게 임오군란이었습니다.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면 그 나라는 끝장난 것이지요. 또 가장 공정해야 할 과거시험장에서도 공공연히 초시부터 돈으로 매매하는가 하면, 고위직 벼슬도 매관매직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럼요, 조선 말엽은 정말 꼴불견이었지요. 매관매직이 공공연했으니까요."

"한 예로 제가 살고 있는 강원도에 조선 519년 동안 관찰사가 54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관찰사 임기가 미처 1년도 안 된 셈이지요. 심지어 어느 해는 1년에도 서너 차례나 바뀌었답니다. 조선조, 특히 후기에는 매관매직이 심했던 탓이지요. 관찰사를 하루만 해도 전관예우를 받았다니까 그 피해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매천 선생은 부패한 관료사회와 결별을 선언한 뒤 귀향하여 전남 구례에서 후세에게 경계를 주고자 역사서 편찬에 온 힘을 기울이셨더군요. 매천 선생은 말하기를 '나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선생은 나라 안의 부패상에 비분강개하면서,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게 내부의 적'이라고 일찍이 내정개혁을 주장하셨지요."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바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진국일수록 기록을 중요시하지요. 보셨지요. 미국이 얼마나 역사 기술과 자료보존에 충실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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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관 견장 ⓒ NARA

미국의 힘

"아카이브 자료실에 히틀러의 두개골 사진, 베트콩의 지하통로 지도, 인민군들의 견장까지 비치된 걸 보고 놀랐습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편지까지 소장하고 있는 등, 미국은 자기 나라 역사는 물론 남의 나라 역사까지 시시콜콜하게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미국의 힘이겠지요."
"지금은 정보가 국력인 시대지요." 

"그럼요. 우리가 그렇게 혹독하게 겪은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록물이 아직도 한국에 제대로 정리된 게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우리가 노퍽 맥아더기념관에서 일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은 채스팩만 다리와 해저터널을 거쳐 왔다. 이 길들은 대서양을 가로 질렀는데 승용차가 바다 위 다리로 달리다가 갑자기 바다 밑 터널로 이어졌다.

우리는 저녁놀이 지고 있는 대서양을 배경으로 승용차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우리는 노퍽을 출발하여 부지런히 달렸지만 워싱턴디시에 이르자 퇴근 시간과 겹쳐 길이 막히고 그새 날이 어두웠다. 손 전화가 울렸다. 김준기였다.

"박 선생, 갑작스레 전화해서 미안하우. 오늘 저녁 시간 괜찮수?"
"저는 괜찮은데 고 선생님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고동우는 곁에서 통화내용을 듣고 당신도 괜찮다고 했다.

"마침 곁에서 듣고 있는 고 선생님이 괜찮다고 합니다."
"기럼, 일단 농문옥으로 오디."
"네, 알겠습니다. 고 선생이 30분 정도면 용문옥에 도착할 예정이랍니다."

워싱턴디시 나들목을 지나자 곧 길이 뚫렸다. 고동우는 용문옥 앞에 승용차를 세웠다. 김준기 부부가 외출준비를 하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우리 특별히 양식으로 합세다. 우리 부부도 오랜만에 기분 좀 내가시오(내겠어요)."
"감사합니다. 좋습니다."
"기럼, 우리 차를 따라오시디요."

지배인 영옥이가 운전했다. 용문옥에서 가까운 양식집이었다. 영옥은 라이드가 끝난 뒤 인사를 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나중에 전화하면 오라야."
"네, 아버지."

영옥이는 그 자리에서 차를 돌려 돌아갔다.

워싱턴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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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채스팩만 바다 위의 다리 ⓒ 박도


양식집은 워싱턴호텔의 맨 위층으로 전망이 매우 좋았다. 자리에 앉아 김준기가 말했다.

"서루들 인사하라우."
"한국에서 온 박상민입네다."
"메릴랜드 락 빌에 사는 고동우입니다. 이렇게 용문옥 안방마님을 봬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최순희예요."

최순희는 일흔넷 나이보다 젊게 보였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사업으로 성공하자 나이보다 젊어진 모양이었다.

"박 선생은 구미 사람이우.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가 퇴직한 뒤 요즘은 소설두 쓰구, 한국현대사 자료두 수집한대서. 이번이 세 번째루 미국에 왔대요. 요기서 한국전쟁 사진을 구해 사진집을 낸답네다."
"어머, 그러세요. 아주 귀한 일을 하시네요. 저는 작가들을 가장 존경해요."

"감사합니다. 오늘 밤 그동안 살아오신 귀한 이야기 많이 들려주세요."
"하지만 내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건 싫은데…."

"알겠습니다. 소설은 작가가 어디까지나 현실을 유추하여 꾸민 이야깁니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황당한 이야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제가 호남의병전적지 답사로 전남 장성에 갔더니 홍길동전의 홍길동이도 실존 인물이더군요. 좋은 작품일수록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 꾸민 이야기이지요."
"알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영광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냥 그동안 살아오신 얘기를 편안하게 들려주십시오. 저는 사람들의 살아온 진솔한 얘기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시 사람 사는 진솔한 이야기이지요."
"기건 기래요. 기래 오늘은 매가도(맥아더)기념관에서 어떤 사진을 찾았수?"

김준기가 이야기의 물꼬를 트고자 맥아더기념관 다녀온 이야기를 물었다.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사진들입니다. 헌병들이 좌익사범들을 골짜기로 데려가서 처형하는 장면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한때 '골로 간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 말의 유래가 실감나도록 그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제 아버지가 그때 그렇게 골로 가셨지요."

'골로 간다'는 사진 이야기가 최순희의 말문을 자연스럽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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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들이 군인들의 인솔로 '골(골짜기)'로 끌려와 처형되고 있다(대구 근교(1951. 4.). ⓒ NARA, 이도영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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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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