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교실의 모습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자마자 '추가된' 업무가 있다. 수시를 준비하는 고3 수험생들이 쓴 자기소개서를 교열해주고, 드물게 추천서를 써주는 일이다.
서부원
입학사정관제 전형의 허점을 눈치 챈 몇몇 '노련한' 아이들은 추천서에 기입할 요구 사항을 적어서 담임교사를 찾아온다. 교사 입장에서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자를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스스로 무뎌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추천서라면 객관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되 교사의 주관적인 글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신'을 피력했다가 자칫 제자에게 불이익이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제출하기 전에 아이에게 되레 추천서를 검열 받는 황당한 일마저 벌어진다. 하긴 교사 추천서를 아이와 학부모가 작성해 어투만 살짝 바꿔 제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니 그 정도쯤은 나무랄 일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준비하는 대학과 교육부가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자소서와 함께 굳이 교사 추천서를 요구하는 까닭은 결국 아이들의 잠재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입학사정관제 전형은 취지야 백번 공감하더라도 학벌구조 등 왜곡된 교육 현실 속에서 적용이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는 시행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곧, 추천서의 부실 문제는 예상된 제도상 '허점'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와중에 지난 달 말, KBS 뉴스를 통해 '못 믿을 교사 추천서'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방송됐다. 기사에 따르면, 대필과 표절로 점철된 믿지 못할 추천서들이 대학 측에 제공되고 있다며, 그로 인해 입학사정관제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고3 담임교사들을 마치 입시 비리에 연루된 '범죄자'인양 내몬 것이다.
"이제 누가 고3 담임을 맡으려 하겠나. 학생부도, 추천서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하니 차라리 이참에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아예 폐지하는 게 어떤가? 대학과 교육부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 생긴 부작용인데, 그에 대한 책임은 전부 수험생들과 고3 담임교사더러 지라는 것 같아 분노를 느낀다."뉴스를 접한 현직 고3 담임교사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모든 게 추천서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즈음 전국 대부분의 고3 교실은 파행적으로 운영된다. 교실은 자소서와 추천서가 필요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경우로 양분된다. 기한 내에 많게는 20여개의 추천서를 작성해야 하는 고3 담임교사에게도 교과 수업은 사치다. '소스'를 얻기 위한 상담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이때다. 그야말로 2학기 고3 교실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한다.
제2 외국어 등 일찌감치 1학기에 종강된 '기타 과목'들은 말할 것도 없고, EBS 수능 교재로 문제풀이를 하는 일부 과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은 자습시간으로 운영된다. 고3 수험생들은 2학기 중간고사를 개학날 치르고, 불과 몇 주 뒤 기말고사가 이어진다. 수능 준비에 '올인'하도록 하는 나름의 배려인데, 수시모집이 시작되는 9월 초면 사실상 고3 학사일정은 끝난다.
입학사정관제 전형 문제점, 보완 먼저 하시라입학사정관제 등 다양한 입시 전형 방식은 우리나라 일반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6학기가 아닌, 5학기 체제로 빠르게 변화시켰다. 그와 함께 학교교육을 입시 전형에 철저히 종속시켜버렸다. 예컨대, 학교 내에 각종 경시대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영어논술반, 수리탐구반 등 이른바 '스펙 쌓기'형 동아리만 넘쳐난다. 풍물반이나 댄스반 등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자꾸만 우리 교육 현실을 빗댄 것처럼 들린다. 백년하청이라며 손 놓을 게 아니라면, 기본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대학과 교육부가 입학사정관제의 도입 취지만 되뇌며 일부 수험생과 교사들의 일탈 행위를 꾸짖을 게 아니라, 학교 현실을 감안한 제도적 보완책을 우선 고민해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입학사정관제가 정착된 미국을 마구잡이로 따라하려다 보니, 제반 '환경'은 무시하고 '제도'만 베끼려다 생긴 폐해다. 일례로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40명이다. 별도의 추천서는 고사하고, 학생부의 행동발달상황이나 교과학습발달사항 따위를 기록하는 것조차 버겁다.
이렇게 하소연하며 교원을 확충해달라고 소리를 높이면, 교육부나 교육청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 수가 급감하는 추세이니 얼마 안 있어 OECD 국가 평균치에 근접할 것이라고 답변한다. 십수 년 전 초임 시절 때와 직접 비교해보니 학급 당 학생 수 변화가 있긴 했다. 달랑 세 명. 농어촌 학교의 경우 격감했을지 모르지만, 도시에서는 별반 변화가 없었던 거다.
교사 추천서의 대필과 표절 문제가 기사화하면서 그렇잖아도 질타 받는 학교교육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담고자 했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최소한 입학사정관제 전형의 문제점에 대한 심층 분석이 뒤따라야 했다. 몇몇 고3 담임교사들 손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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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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