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나타날 현(現)은 옥(玉)의 무늬처럼 드러남(見)을 의미한다.
漢典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자마자 제2외국어를 선택해야 했다. 독일어와 중국어가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 독일어 선생님이 젊고 예쁘다는 수군거림이 있었고, 예상대로 60명 중 40명 넘는 아이들이 독일어를 택했다.
담임선생님은 독일어가 너무 많다며 몇 몇 아이들을 중국어로 재배정했다. 나는 그 몇 아이 중의 하나였고 그렇게 우연히 선택한 중국어는 내 전공, 내 삶이 되었다. 운명은 늘 우연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는 아무도 모르고(不知哪片雲彩會下雨)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앞에 놓이는 순간,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그 순간들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별 것 아닌 그 우연의 순간이 바로 운명의 순간 혹은 행복의 순간일 수 있으니 말이다. 답은 늘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간이 우리 앞을 지나(過) 가면(去), 그 순간부터 과거(過去)로 퇴적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미래(未來)이니, 언제든 다가 올(來) 태세로 대기상태다. 그럼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現) 있는(在), 현재(現在)라는 시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현재'는 명실상부하게 우리 앞에 가만히 나타나 있는 걸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눈이 눈썹을 보지 못하듯(目不見睫), 현재는 늘 너무 가까이에 있어 시선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십상이다.
나타날 현(現, xiàn)은 옥(玉)의 무늬처럼 드러남(見)을 의미한다. 玉이 의미부, 見이 소리부로 이뤄진 형성자다. 단단한 옥돌 안에 나타난 무늬처럼 고단한 삶 위에 드러난 순간이 바로 '現'인 셈이다. 삶은 이렇게 드러난 순간의 무늬들이 합쳐져서 이루는 하나의 그림일 것이다. 순간의 합이 곧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정작 믿고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현(現), 이 순간이어야 한다.
중국인들이 중시하는 유교에는 '창세기'도 '사후 세계'도 없다. 다만 현세만이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국인들이 우리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재의 의미에 더욱 충실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젊어서는 나이 들었을 때를 생각해서 배움에 힘쓰라"는 말처럼 미래를 위해 오늘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라는 가르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는 오늘 또한 행복해야 하고, '현재' 라는 밑변을 디딘 두 발은 순수하게 '현재'에 설레 가벼워야 한다.
일생에 단 한 번, 딱 한 차례의 만남(一期一會), 먼 우주를 돌아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순간,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장자(莊子)>에서 인생은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白駒過隙)'과 같다고 하며, <그리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우리는 심연에서 와서 심연으로 돌아간다. 두 심연 사이의 빛나는 막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순간'이라는 말이다. 순간, 순간으로만 구성된 인생의 '현재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순간'뿐인 인생에서, '현재'를 유보하거나 희생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가치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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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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