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1월 26일1787년 1월 26일 오늘날의 시드니 항 인근에 유니온 잭을 게양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공표하는 아더 필립 대령, 호주는 이날을 건국일(Australian Day)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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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호주 총독으로 임명된 필립 대령이 이끌고 왔던 1500여 탐험대 중에는 568명의 남자 죄수와 어린이 13명을 동반한 191명의 여자 죄수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19세기 중반 유배정책이 폐지될 때까지 죄수선을 타고 영국으로부터 유배되어 온 죄수들의 노동력은 호주의 건국과 경제발전의 기초를 놓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죠.
시드니에서 시작된 초기 개척지가 점차 서부로 뻗어나갈수록 죄수들도 점차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해서 크고 작은 농장들을 개척했습니다. 또 남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메리노양(洋)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양모 산업이 호주산업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되죠. 1851년 발견된 대규모 금광은 '골드 러시' 열풍을 불러와 1850년에 40만 정도였던 백인 인구는 11년 만에 117만 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18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경제공황과 극심한 가뭄은 호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의 방직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호주의 양모 산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까지 전 세계에 양모를 공급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부자들은 양털깎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값싼 노동자를 수입하는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죠. 실업률은 30%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1891년에 접어들면서 양털깎이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이런 배경 속에서 왈칭 마틸다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891년 1월 5일, 퀸즈랜드 바칼딘에서 양털깎이 노동자 1000여 명이 대규모 파업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수년 동안 곳곳에서 크고 작은 파업이 줄을 이었습니다. 1894년 9월 2일, 윈튼에서 파업에 참여했던 한 독일출신 노동자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프렌치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32살의 사무엘 호프마이스터였습니다. 파업의 와중에 축사에서 일어난 화재로 양들이 타죽는 일이 생겼고, 이 일로 목장 주인과 세 명의 경찰관에게 쫓기던 호프마이스터가 체포 직전 자신을 향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