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처럼 '자찬 묘지명' 쓴다면 첫 문장은?

[서평] 개정증보판 <다산산문선>

등록 2013.10.02 12:04수정 2013.10.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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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산문선>책표지. ⓒ 창비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심이 넘실대던 금남로와 충장로는 권력욕에 눈먼 신군부의 잔인무도한 진압으로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된 계엄군들은 양민의 목숨을 짓밟았고, 무자비한 권력에 제압당한 양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도망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선생님 한 분도 비극의 현장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았다는 이유로 몸을 숨겨야했습니다.


선배의 강권으로 도피생활을 시작한 선생님이 보낸 수배기간 7개월은 공포와 조바심의 세월이었습니다.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군화 소리는 숨통을 끊으려는 억압의 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고, 거리에 내걸린 수배전단에 실린 사진은 심장을 조여 오는 포승줄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도망자가 되어 은둔생활을 시작한 선생님은 책 한 권을 품고 다녔으니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영인본(경인문화사 1970) 전6권중 제1권 <시문집>이었다고 합니다.

수배자가 된 선생님은 한시도 떠나지 않는 불안·초조·근심·걱정을 잊기 위해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에서 시공을 초월하는 동병상련,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 번역하며 시공을 초월하는 동병상련 느꼈을 듯

살펴보건대, 무릇 범죄자를 벌주는 법이란 먼저 본인 자신이 범한 죄를 정해놓고 이어서 집안사람들이나 고을 사람들의 죄가 이 사람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녹암 혼자에 있어서만은 말할 때마다 고을 사람들이나 집안사람의 죄를 본인 몸에다 덮어씌웠으니 법이나 판례에는 없는 일이었다. -114쪽 '녹암 권철신 묘지명' 중-


도망자가 된 선생님이 그 책을 읽고 번역해 놓은 한 부분입니다. 예나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속성은 더럽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잔인한가 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우는 게 권력이고, 한 생명쯤 아무렇지도 않게 저자에 내걸 수 있는 게 권력이라는 걸 읽어야 하는 마음은 공포와 불안, 두려움과 무력감 그 자체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1980년 12월, 온양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7개월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며 한 권의 책을 풀어헤치며 새긴 이는 13대와 1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박석무 전 의원이며, 그때 그가 새기고 풀어헤친 책은 28년 전에 초판으로 출판된 <다산산문선>(창비, 1985)입니다. 

신군부의 권력이 살벌하게 설치던 시절, 책을 내면서도 책을 내게 된 동기나 어려움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시대에 출간하였던 <다산산문선>이 다산 탄신 250주년(2012년) 사업의 일환으로 3년간의 작업 끝에 이번에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다산 탄신 250주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펴낸 <다산산문선> 

<다산산문선>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신유사옥 당시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일대기 등을 다산이 '묘지명(墓誌銘)' 문체를 빌려 기술한 글들을 모아 번역한 내용입니다.

책은 다산이 직접 쓴 자신의 묘지명, '자찬묘지명'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묘지명'은 죽은 이의 덕이나 공로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묘지에 새겨 넣은 글입니다. 하지만 다산은 회갑 나이에 스스로 묘지명을 작성합니다.

요즘 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사전 유언장 쓰기'와는 다른 형식 다른 내용입니다. 유언장 쓰기가 제3자에게 자신의 유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산이 쓴 '자찬묘지명'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자신이 갈무리해야 할 인생, 여생을 이렇게 살겠다는 의지까지를 포함시킨 일대기입니다.

책에서는 다산이 가장 따르고 존경하던 선배 녹암 권철신을 비롯하여 1801년 신유사옥 때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선배 및 지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사적들도 '묘지명'으로 싣고, 혈육과 외가 쪽 사람들의 일대기도 묘지명으로 싣고 있습니다. 

오호라! 인후仁厚 하기가 기린 같고 자효(慈孝)하기를 호랑이나 원숭이처럼 하고 영특한 지혜는 샛별과 같고 얼굴 모습은 봄날 구름의 밝은 태양 같은데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저자의 구경거리로 널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산산문선>105쪽 '녹암 권철신 묘지명' 중-

다산은 묘지명을 빌어 시대를 고발하고 부패한 권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잔인하게 자행되고 있는 권력, 권력에 취해 점점 망가지고 있는 세도가들, 권력에 아부하고 있는 관리들 실상을 노골적으로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사회상도 읽을 수 있고, 그때 당시의 사회적 가치도 읽을 수 있습니다.

쫓기는 몸으로 새기며 번역한 글이라서 그런지 더욱 절절해

때로는 어떤 결과보다 그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더 감동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과정이 그렇고 악전고투 끝에 거두는 승리와 성공 과정이 그렇습니다.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를 알기 전에 보던 국화는 그냥 가을에 피는 소담스런 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당의 시를 읽고 나서 보는 국화에서는 어느 날 밤에 들었던 소쩍새 소리도 연상되고, 먹구름 뒤에서 우르릉 거리던 천둥소리도 들리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내 누님을 닮았고 저렇게 보면 무서리 내린 가을날 아침의 풍경이었습니다.

같은 계절에 같은 모양새로 피는 국화, 꽃말도 달라지지 않았고 향기 또한 달라지지 않은 국화이건만 이리 다르게 보이는 건 국화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산산문선>으로 엮어낸 묘지명들을 읽던 저자의 마음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의 글이 되기도 했겠지만, 때로는 억울한 심정을 더욱 억울하게 하는 분노의 글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마음과 심정으로 풀어낸 글이라서 그런지 흐느낌을 보는 만큼이나 절절하고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만큼이나 애절하면서도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에 분노하게 합니다.

오호라! 예부터 국문하는 옥사를 벌이는 데는 선조 기축년이나 숙종 경신년 같은 경우에도 또한 반드시 고발자의 상변(上變)이나 죄수의 공초 중에서 끌어들이거나, 혹은 문서가 압수되거나 혹은 죄수의 증거가 있어야 이에 체포해 들이고 이에 고문하고 이에 사형하고 이에 기시를 하였던 것이다. 대계로써 발단을 일으키고 신문으로 죄안을 성립시켜 증거도 없고 장물도 없는데 곧바로 장살하여 끝내 기시한 것은 기축·경신년의 옥사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한두 명의 음흉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입을 놀려 10년이 넘도록 유언비어로 선동하고 현혹하여 정권 잡은 사람들의 귀에 익도록 해놓았으니 정권 잡은 사람들이 무얼 알겠는가. 평소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만 익히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였을 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모든 대부(大夫)들이 죽여야 한다고 해도 들어주지 말고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연후에 다시 조사해보아 죽일 만한 것이 나타나서야 죽인다"라고 했다.-<다산산문선> 146쪽 '정헌 이가환 묘지명' 중-

5월 광주를 기억하고, 어른거리고 있는 권력의 속성을 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 탓인지 누구누구의 묘지명에 실린 내용들이 결코 허투루 읽히지 않습니다.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사람들도 이 책 좀 읽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휘두르고 있는 권력이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는 걸 그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200여 년 전 사람인 다산은 '묘지명'으로 그때의 실상을 후세에 알리고, 수배자가 되었던 한 분 선생님은 <다산산문선>을 통해 예나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권력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어느 분이 다산처럼 '자찬묘지명'을 쓴다면 어떤 말로 시작해 어떤 내용으로 기록할지가 문득 한참이나 궁금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다산산문선>┃지은이 정약용┃옮긴이 박석무┃펴낸곳 (주)창비┃2013.09.16┃2만 5000원

다산산문선

정약용 지음, 박석무 옮김,
창비, 2013


#다산산문선 #정약용 #박석무 #(주)창비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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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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