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회 현장에서 세상을 배웠다”고 말하는 자크. 예순을 넘긴 지금도 파리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집회에 참석한다.
자크 제르베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자본가들에게 뺏기지 마라 - 당신은 그런 어머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나. "꼭 그렇진 않다. 홀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아들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뻗어오는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LCR(혁명적공산당동맹)이라고 하는 트로츠키 정당에 가입했다. 급진적인 좌파 정당이었다. 당시는 어머니를 배반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는 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3년 뒤 나는 LCR을 탈당했다. 지금도 극좌 정당에 부르주아 엘리트들이 더 많듯이, 당시 LCR도 그러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는 다른 문화와 언어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 자녀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고,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그러한 계급 장벽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나에게 '자본가들에게 좋은 것을 다 주지 마라.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네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을 때 주저하지 말고 문을 열고 들어가라. 누가 '거긴 네 정원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든 이렇게 대답해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모두의 것이다'라고 늘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내가 한때 캐딜락을 타고 다니거나 혹은 비싼 슈트를 사 입을 때면 어머니는 계급을 배반했다며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특히 내가 에콜 노르말 수페리에르(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곳은 부르주아들의 학교다. 네 자리가 아니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어머니는 정치교육을 통해 자신 앞에 가로놓인 장벽을 뛰어넘으려 했으나, 시시때때로 그 장벽을 내 앞으로 가져다놓는 모순 속에 살았다. 어머니가 걸려 넘어지곤 했던 그 장벽은 물질적 측면에서보다 문화적 측면에서 더욱 완강한 장애로 작용했다. 부르주아들이 갖는 것을 나는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그것에서 소외될 것이라는 열등감. 피에르 부르디외가 통감했고 그래서 이론화했던, 바로 그 문화적 구별 짓기의 장벽을 어머니는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 당신에게 68혁명은 어떤 의미인가.
"열일곱 살이던 고교 시절에 68혁명의 진통을 겪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참여했지만, 한편으론 관객이기도 했다. 68혁명의 거대한 소요 속에서도 대강당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근사한 언어로 연설하는 것은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에 나는 주목했다. 한편으론 우파도 68혁명을 은근히 이용한다는 정황을 감지했다. 샤를 드골이라는 완고한 민족주의자의 통치하에서는 현대적인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게 용이하지 않았다. 이 모든 완고함을 갈아엎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의 전통을 모두 깨부수는 게 그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국에 전쟁 포기를 요구한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에서의 승리, 68혁명의 거대한 물결은 나를 비롯한 당시 청년들에게 변혁의 주체라고 하는 자신감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이상세계에 대한 배포를 안겨주었다. 그때 시를 쓰던 친구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을, 영화판을 쫓아다니던 친구들은 자신이 위대한 영화감독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들은 남들이 알든 모르든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초등학생조차 장래희망으로 정규직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현실과 대조되는 이 대목에서 상상을 해보았다. 열일곱의 나이에 이미 위대한 시인이었던 저 무수한 랭보들을. - 그 후에 공산당원이 되어 활동한 건가?"그랬다. 그러다가 이상주의자였던 나의 정치적 믿음에 균열이 가는 계기가 있었다. 1971년 파리 코뮌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공산당은 동유럽의 공산당원들을 위한 파리 코뮌의 격전지 방문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동유럽 공산당은 오래 활동한 당원들에게 포상으로 파리 방문을 허락했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동유럽의 공산당원들을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았다. 바로 그때,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들이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마니아, 소련,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등지에서 온 공산당원들은 하나같이 나이든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파리 코뮌에는 관심도 없었다. 약속 장소에 모인 열 명에게 지하철 티켓을 나눠주고 한참 가다 보면, 뒤에 남는 사람들은 두 명 남짓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파리의 싸구려 가게에 가서 가족들에게 선물할 청바지나 티셔츠를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나눠준 지하철 티켓을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100년 전 코뮌주의자들의 행적보다, 프랑스에 넘쳐나는 소비자본주의에 눈이 가는 게 당연했다. 낯선 것을 보기 위해 다른 세계를 찾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말할 때면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태도를 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더욱 놀랐던 건, 그들 대부분에게서 어떤 견고한 정치의식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의 모두, 소비에 매혹된 인간이었다. 나는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실패한 실험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모순 속에 소요하면서도 당을 떠나기보다, 의문을 품고 탐색하는 쪽을 택했다. 무엇이 그 늙은 공산주의자들을 질식시켰는지를."
코뮌의 격전지를 안내해주러 나선 젊은 프랑스의 공산주의자가 지하철 티켓을 나눠주자 그걸 팔러 사라져버린 늙은 동구권 공산주의자들. 그 상황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할 때, 나는 자크라는 사람이 그때부터 일찌감치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관대함과 연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이 더 이상 자기개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자각했던 1979년, 나는 당을 떠났다. 공산당은 심각하게 교조화되었고, 자기개혁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퇴화해갔다. 그것은 이미 내가 동구 공산당원들에게서 보았던, 비대한 교조주의의 침침한 그림자였다. 모든 불가침의 권위를 누리는 자들은 모두를 질식시키고 만다. 자유를 호흡하지 못하는 세상은 질식사로 그 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철폐를 바란다면, 일어서라! 불복하라! - 탈당 이후의 삶은 전과 많이 달라졌나. 정치적 지향에도 변화가 있었나. "탈당 이후 나는 개인적인 공산주의자로 살기 시작했다. '코뮤니즘(communism)'은 공유재산을 뜻하는 라틴어 'commune'에서 따온 말로 공동소유, 나눔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고 사유하는 것, 나 혼자만 갖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한때 일상적 실천보다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소위 혁명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둘 다 필요하다.
정신, 즉 개개인이 각자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흔히 일상에서의 실천을 말하는 사람들과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려 한다. 반드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한 가지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를 변혁할 수 있을 때라야, 세상도 변혁할 수 있다.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이유는, 개개인이 자신을 변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16세기 모럴리스트 라 보에시(La Boétie)가 <자발적 복종에 관한 고찰>에서 한 말을 되새겨보자. "독재자가 그토록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더 이상 독재가 없을 것이다."
불복종은 어쩌면 가장 간단하게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다.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야말로, 우리가 빠져든 이 깊은 늪으로 우리를 인도한 주체들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구조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도구를 우리에게 주었다면, 프로이트는 우리가 각자의 내면을 해방하기 위한 도구를 주었다고 본다. 이 둘이 제공한 도구를 통해, 우리는 집단과 개인이 덜 고통스럽고 덜 비굴하게 살 방법을 찾을 수 있다."
- 아들에게도 당신의 정치적 신념을 교육했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아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새로운 방식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전하려 했다. 아들에게 '부모의 뜻을 거스를 때,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매일매일 너는 부모의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구축한 네 모습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내 말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들은 사춘기 때 '이상한' 옷차림이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종종 했고, 내가 그런 모습을 나무라면 '아빠가 부모의 맘에 안 들게 행동하라고 말했잖아요'라며 항변했다. 그때는 나도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한 아들을 사랑한다."
한국영화, 그 숨 막히는 잔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