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 다 빨아먹는 그놈, 당장 헤어져"

[공모-관상이야기] 점 맹신하는 엄마 때문에 괴로운 우리 자매

등록 2013.11.26 13:55수정 2013.11.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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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자매의 사주단자 서랍 깊은 곳에 각종 집문서들과 고이 보관되어 있다. ⓒ 남기인


"얘 사주를 보니 딱 나오네. 아무 걱정 말어. 얜 그냥 누워서도 건대 갈 애야~."


엄마는 점쟁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고3 시절, 친구의 엄마들은 백일기도에 입시설명회까지 섭렵하며 극성이었지만 엄마는 여유로웠다. 엄마의 여유로움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수능 점수는 처참했다. 자타공인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였던 필자는 수학 점수에서 다 찍어도 받기 어렵다는 그 7등급을 받았다. 아무리 다른 영역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도 이미 서울 내의 4년제 대학 진학은 불가능해 보였다.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고, 전문대학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시 원서를 냈던 대학은 고려대, 건국대, 경희대, 경원대, 단국대, 동국대, 서강대, 세종대, 중앙대, 한국외대로 총 10곳.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며 줄줄이 떨어졌다. 가장 늦게 합격 발표가 있었던 건국대, 필자는 정말 거짓말처럼 그 해에 건국대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엄마는 점쟁이의 말이라면 모두 맹신했고, 곧 재앙이 시작되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겨 들뜬 마음으로 자랑했지만 엄마의 반응은 냉랭했다.

"일단 사주부터 가져와."

'결혼시킬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스무살인데 그런 게 뭔 필요가 있냐'는 아빠의 만류에도 엄마는 단호했다. 그 후 며칠간 알콩달콩 연애를 하며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엄마의 전화가 왔다.


"화양리 할아버지(점쟁이)가 그러시는데, 그놈은 안 된대! 너의 좋은 기를 다 빨아먹는데다가 너 하는 일에 죄다 걸림돌이래. 그렇게 상극일 수가 없대. 당장 헤어져!"

하지만 그 말만 믿고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참 집요하게 연애 방해공작을 펼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늘 그놈 만나는 거야? 절대 안돼. 일찍 들어와' 하는 문자가 쇄도했으며, 주말에는 외출조차 금지 당할 때도 많았다. 당장 그 점쟁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의 철저한 방해공작 덕분이었는지, 그걸 극복할 사랑의 힘이 부족해서였는지 결국은 5개월 만에 첫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됐다. 앞으로 남자친구가 생겨도 다시는 엄마에겐 말하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딸 유학 보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시체로 돌아온다고!"

언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언니의 남자친구는 언니와 궁합이 좋아 잠잠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대학 졸업 후 안정적으로 회사생활을 하고 있던 언니가 갑자기 유학을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평소 공부에 대해 미련이 많았던 언니는 여러 번 고심한 끝에 유학행을 결정한 듯했다. 엄마는 서울 곳곳의 용하다는 점집은 다 찾아다니며 언니의 유학문제를 물었다.

결과는 절대 안 된다는 쪽이 과반수였다고 한다. 심지어 한 점쟁이는 "절대 안 돼. 그저 근신하며 조용히 하던 일 하라 해. 딸 유학 보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시체로 돌아온다고, 시체!"라는 위협적인 말도 했다. 엄마의 머릿속엔 이미 '유학 가면 곧 시체로 돌아온다'는 섬뜩한 명제가 확립되었고, 그렇게 언니의 유학은 좌절됐다.

엄마는 점쟁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가끔은 그 점이 좋을 때도 있다. 지난 여름방학, 여러 곳 지원했던 인턴십에 모두 떨어졌지만 엄마는 필자의 능력부족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어~ 점쟁이가 그러던데 네가 올해 삼재가 겹쳐서 일이 잘 안 풀리고 그렇대. 내년부턴 다 잘 될 거야"라고 위로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으니 엄마의 점괘 사랑을 말리고 싶진 않다. 점쟁이가 '말하는 대로' 우리 집이 흘러간다는 사실이 좀 씁쓸하긴 하지만.

요즘 엄마의 최대 관심사는 '언니의 결혼'이다. 언니는 올해 스물일곱이다. 서른두 살은 넘어야 제대로 된 짝이 나타난다는 점쟁이들의 말에 엄마는 꽤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에휴, 그냥 좋~은 사람만 생기면 얼른 시집보내고 싶은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사주가 좋~은 사람이어야겠지. 점쟁이가 좋다는 사람이어야겠지.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은 할는지~' 아이돌의 노래 한마디가 너무나 공감이 가는 우리 자매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점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관상 또는 사주 이야기' 기사공모 응모글입니다.
#사주 #점쟁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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