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김치집에 손님들이 놀러오면 가장 인기가 많던 총각김치를 다음날 또 담갔다.
문세경
어제는 동치미, 오늘은 총각김치, 하루 새 두 개의 김치를 담그고 나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배추김치는 선뜻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질 않는다. 그건 워낙 일이 복잡하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철이 되면 엄마랑 같이 우리 집에서 김장을 했다. 재료를 다 다듬고 준비해 놓으면 엄마는 적당량을 혼합해서 버무리고 속을 넣는 일을 했다.
양념의 양을 가늠하는 일이 김치의 맛을 좌우 한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가늠한 양으로 담근 김치와 엄마가 가늠한 양으로 담근 김치는 어쩌면 그렇게 다른 맛이 나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요리는 손맛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제 엄마는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한다는 선언을 했다. 친구들은 시댁이나 친정에서 잘도 얻어다 먹는다는데 나는 덕이 부족한지, 어디서도 김치 갖다 먹으라는 말이 없다. 드디어 김장김치를 나 혼자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목요일이다. 주말이 돼가니 슬슬 술 약속 잡을 생각만 한다. 어라? 그런데 이번 주말은 주초부터 약속이 없더니 주말까지 조용하다. 그러다 보니 할까 말까를 망설이던 김장 생각이 났다. 마음 속에서는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 두 개가 싸우고 있었다. '열 포기라도 해서 김치 냉장고의 빈 통을 채워놔야 하지 않을까?'라는 착한 마음, '빈 통은 얻어온 김치로 채우면 되지'하는 나쁜 마음.
결국 착한 마음이 이겼다. 금요일엔 배추를 사서 절이자. 요즘은 절인 배추를 사서 양념만 넣는다고 하는데 난 왠지 절인 배추를 사고 싶지 않았다. 값도 비싸지만 배추를 절여본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김장의 반은 배추를 잘 절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배추를 잘 절이면 김장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드디어 불금(불타는 금요일)이 왔다. 예상대로 약속은 생기지 않았다. 퇴근길에 배추 3망(9포기)과 갓, 젓갈, 파, 마늘, 생새우, 소금 등을 사서 왔다. 오늘 저녁엔 배추를 직접 절이고 토요일에 속을 넣어야지 라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기에 남편에게 카톡으로 통보를 했다.
"나 오늘 배추 절여서 내일 속 넣을 거니까 옆에서 도우미를 해줘." "어? 나 이번 토요일에 홍성에 가는데. 며칠 전에 얘기 했잖아. 1박 2일로 홍성에 귀농교육 받으러 간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난 못 들었는데. 그럼 김치는 나 혼자 다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지.
"난 못들었단 말야. 이제 와서 그 말을 하면 어떡해? 김치 안 먹을 거야?" "......."이런 낭패가 있나. 난 계획이 틀어지는 걸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그냥 계획대로 가는 거다. 어차피 김치 담궈 놓으면 반찬 타령은 줄어들 테니까.
김장 완성! 송년회까지 해방이다! 퇴근하면서 산 배추를 열심히 절였다. 모든 재료를 내일 아침 남편이 홍성에 가기 전에 충분히 부려서 준비하도록 하자. 속 넣는 것까지 도와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한 남편은 이번에도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9포기의 배추는 만족할 정도로 잘 절여졌다.
토요일 아침, 남편은 떠나고 나는 준비한 재료를 열심히 썰어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김치소를 만들었다. 혼자 마루에 쪼그려 앉아 속을 몇 개 집어넣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이걸 나 혼자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는 건가 싶었고, 가족을 위한다는 아름다운 포장 속에 갇힌 가사노동이 하루빨리 귀한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