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김치 담그기준비중입니다.
김관숙
식탁에서 무채 썰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이쪽을 보고 한마디를 합니다. 그새 중간광고 시간인 모양입니다.
"나 자랄 땐 말야 배추에 굵은 꼬랑지가 달렸었는데. 거 참 맛있었는데." 지금은 배추가 통이 크고 꼬랑지가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배추들이 재래종이라 통이 작았고 실한 꼬랑지가 붙어 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어렸을 적에 꼬랑지를 깎아 먹던 일이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단발머리 시절에 먹던 배춧국이 생각납니다.
김장을 도와주러 온 외할머니가 가마솥에 굵은 마른새우 두어 줌을 넣고 배추된장국을 끓입니다. 외할머니는 상자쪼가리를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활활거리는 장작불을 부지깽이로 건사하면서 배추꼬랑지를 하얗게 깎습니다. 온 집안에 배추된장국 냄새가 가득해지면 그제야 외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드르륵 하고 가마솥 뚜껑을 절반쯤 열고는 양은 양푼에 소복한 배추꼬랑지들을 쏟아 넣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
"일찍 넣으면 배추꼬랑지가 물러지고 단맛도 없어지지." 그때 이후로 나는 외할머니가 끓인 배춧국 같은 구수한 배춧국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레슬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광고시간도 아닌데 남편이 마늘을 깨끗하게 씻어서 작은 소쿠리에 건져놓고 믹서기를 꺼내 놓습니다. 나는 무채를 썰다가 말고 얼른 다가가서 적당량에 새우젓과 마늘 생강을 믹서기에 넣고 생수를 부어주고 돌아섭니다. 착한 도우미인 남편이 재빨리 작동 버튼을 눌렀습니다. 얼른 끝내고 나서 레슬링을 편히 봐야겠다는 눈빛입니다.
요즘은 무채 소를 많이 넣지 않습니다. 배추김치에 무채 가 많으면 털어내고들 먹습니다. 그래서 무채를 조금만 만들어 내 방식의 소를 만듭니다. 무채에 믹서기의 양념을 붓고 파와 고춧가루를 넣고 생수를 부어 아주 걸쭉하게 소를 중간 양푼 가득히 만듭니다. 고춧가루 물이 든 소의 빛이 황홀할 정도로 곱습니다. 예상대로 간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습니다. 남편의 입맛을 딱 맞추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식탁 앞에 서서 배추포기 사이사이에 소를 바르는 듯이 넣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김장을 늘 혼자서 합니다. 친구들이 오면 계속 수다를 떨면서 소를 넣습니다. 나는 그게 싫습니다. 비위생적인 느낌도 듭니다. 혼자 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습니다.
레슬링 경기가 끝나자 남편이 슬슬 오더니, 배추 사이에 소가 흘러나오지 않게 줄거리 하나를 당겨 이파리를 펴서 배추를 앙팡지게 여며놓는 것을 보고 빙긋 웃습니다.
"그렇지, 양념이 새지 않아야 해. 그래서 우리 집 김치가 맛있다니까. 근데 배고프지 않아?" 나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일 뿐입니다. 사실 배가 고픈 줄을 모르겠습니다. 소를 넣은 절임배추들이 김치냉장고를 점점 채워가는 재미에 손을 쉬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에 이런 기쁨에 그 옛날 어머니는 큰 대독 가득히 김장김치를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거뜬히 해 넣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몸살을 앓아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웃으셨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