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지원의 12월

감사와 기원의 달

등록 2013.12.16 16:40수정 2013.12.16 16:4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년을 12개월로 나눈 태양력은 1월 1일을 새해 시작으로 본다. 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는 음력의 한 해는 전통 설에서 시작한다. 학교는 신학기는 3월에 시작하는데 그래서 학교력은 3월 1일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나는 음양이 바뀌는 동짓달을 한 해의 시작이라고 본다. 과거 우리네 세시 풍속도 동지를 '작은 설'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12월은 수확이 끝난 휴식기이면서 다음해 농사를 구상, 계획, 기원하는 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천주교에서는 12월을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달이라고 하는데 의미 있다고 본다.

숙지원은 주변의 풍광이 '기가 막히는 곳'이 아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무척 추워서 사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곳도 아니다. 사철 풍성한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도 없는 곳이다.
때로는 가물고 때로는 비가 많이 내려 식물이 마르거나 녹아내려 한숨짓게 하는 곳이다.

때문에 숙지원은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지에 비해 조금 넉넉한 잔디 공간과 채소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텃밭, 계절의 정취를 살려주는 꽃밭 그리고 사이사이에 백일홍 사과 감 모과 배 대추 자두나무들이 자리 잡은 곳, 그곳에서 노모를 모신 부부가 산다.

a 숙지원의 겨울                  며칠전 눈이 내린날 집의 정면에서 잡은 사진.
봄날을 준비하는 가족이 사는 집이다.

숙지원의 겨울 며칠전 눈이 내린날 집의 정면에서 잡은 사진. 봄날을 준비하는 가족이 사는 집이다. ⓒ 홍광석


더구나 요즘은 찾아오는 이들도 없다.  스스로 유배를 자청한 터라 사람 만나기 위해 외출하는 일은 거의 없다. 겨우 텔레비전과 신문이 세상을 보고 듣는 창이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노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산다.

명색 소설가라고 명함을 걸고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책들은 팔리는 둥 마는 둥했다. 원고료를 기대했더라면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원고청탁은 없지만 나는 글을 쓰고 다듬는다. 상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천년 후에 남을 작품이 되리라는 기대도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의 기록이라는 마음으로 쓴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과 함께 졸문이지만 세상을 향해 쓴 소리도 남기는 일도 나에게는 중요한 일과다. 비록 행동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를 망치는 불의와 부정부패 불법행위를 그냥 보는 것은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성의를 담아 글을 쓴다.

나의 글이 비뚤어진 길을 가는 정치에 작은 경종이 되기를 바라지만 글이란 내 손을 떠나는 순간 또 다른 시비꺼리가 될 수 있기에 큰 기대도 없다. 애초에 일류 작가 또 일류 컬럼니스트가 되려는 욕심은 버린 지 오래다.


제대로 문학 공부를 못했고, 깊이 파고든 전공 분야도 없는 나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이나 주장, 살아가는 이야기를 짧은 글로 남기는데 아마 앞으로도 그런 작업은 당분간 계속 할 작정이다. 

요즘 오후에는 두어 시간 운동 삼아 텃밭을 돌며 괭이로 흙을 뒤집는다. 대체로 농사는 봄에 시작하는 것으로 알지만 흙을 뒤집는 일은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 흙이 숨 쉬는 일을 도와주고 흙속의 나쁜 벌레들을 잡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흙을 가볍게 뒤집는 일은 내년도 농사 준비이기도 하다. 경운기로 한 번 뒤집고 고르면 하루에 끝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텃밭이 얼마 되지 않기에 겨울 동안 슬금슬금 몇 날에 걸쳐 손수 괭이질 하여 흙을 파고 골라 내년을 준비하는 것이다.

내 실력으로 한 이랑 만드는데 쉬엄쉬엄하다보면 꼬박 반나절 걸리는데 그것도 쪼개어 이틀 혹은 사흘 잡아 만들기도 한다. 물론 비 오고 눈이 오면 쉬는 날이다. 괭이로 흙을 파는 일은 내년 농사 준비도 되지만 한편 겨울철에 운동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뱃살을 빼는 데는 괭이질도 효과 있다고 본다. 또 괭이질은 순환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시절 항아리 배였는데 지금은 날씬해졌고, 심장이 좋지 못해(지금도 약은 먹지만) 이따금 응급실 신세를 졌는데 최근 몇 년간은 발작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비추어볼 때 괭이질을 통한 근육 단련의 효과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주치의도 그런 나의 견해에 부정하지 않으며, 아는 양의와 한의사들도 팔 근육과 심장이 연결되어 적절한 운동이 좋다는 말을 했는데 나에게는 고무적인 조언이었다. 농사일은 칭찬을 바라는 일도 그렇다고 자랑하기 위한 일도 아니다. 나와 가족을 위한 일이요 나를 위한 운동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a 숙지원의 봄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었던 지난  봄날 울타리 밖에서 집의 옆모습을 잡은 사진,

숙지원의 봄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었던 지난 봄날 울타리 밖에서 집의 옆모습을 잡은 사진, ⓒ 홍광석


농촌에서 두번째 맞는 겨울이다. 내년에 우리가 원하는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다. 기대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원을 담은 준비는 필요할 것이다.  깨끗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누릴 수 있는 복은 아니라고 본다.

이따금 약초나 외국에서 도입한 새로운 농작물이 과대포장되어 선전되는 경우를 본다. 나는 심각한 독성을 가진 약초가 있듯 아주 좋은 약성을 가진 약초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독초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약이라고 해서 나에게도 좋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도 혈당의 수치가 높은 편이지만 한 때 300을 오르내리고 공복에도 200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 혈당 체크하고 좋다는 약을 먹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약이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약이 좋다는 선전에 혹하지 않는다.

더구나 당뇨 혈압 신장 심장 등 모든 기관에 좋다는 일명 '만병통치약'은 더 신용하지 않는다. 아마 방송이나 신문에 소개되는 '만병통치약'이 정말이라면 세상에는 병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지금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먹었던 음식에 주목한다.

잡곡밥과 채식위주의 식단, 그리고 적당한 운동이 기본이라는 생각을 한다. 거기에 몸에 좋다는 약초는 기능성 식품으로 섭취하면 될 것으로 본다. 요즘 나의 혈당 수치는 역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낮아졌다. 가급적 외식을 삼가고 공장에서 제조한 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나의 노력도 있지만, 나의 건강을 위해 맞춤 음식을 만들어주는 아내의 공이 클 것이다.

조금 더 낮추려는 노력을 하지만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으로 산다. 새해에는 당뇨에 효과가 알려진 기능성 식품 몇 가지 약초를 새로 심어 스스로 임상 실험을 해볼 계획이다.

꽃은 삶의 활력소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꽃밭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내는 끊임없이 심고 꽃 진 것들은 치우고 그 자리에 계절에 맞는 꽃모종을 옮긴다. 그렇다 보니 철쭉 매화 살구 같은 나무 꽃, 수선화 같은 구근식물, 수레국화 샤스타데이지 같은 숙근초는 그대로 두지만 각종 일년초들은 신경을 많이 쓴다.

씨앗을 받거나 알뿌리를 캐어 갈무리했다가 계절별로 심는 아내를 보면서 꽃은 보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도 삶의 활력소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꽃은 기쁨이면서 평화다. 그런 꽃을 보고 화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꽃밭을 둘러보는 일은 몸의 병을 치유하는데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많이도 받았다.  고추 참깨 들깨 가지 상추 오이 토마토 옥수수 참외 수박, 마늘 양파 감자 고구마 야콘 토란 생강, 상추 부추 쑥갓 청경채 신선초, 완두콩 강낭콩 메주콩 팥 검은콩, 김장 무와 배추 알타리무 파 갓, 매실 산복숭아 보리수 오디 감 모과 ….

그리고 수선화 튤립 할미꽃 철쭉 아이리스 샤프란 구름국화 양귀비 물망초 수레국화, 채송화 봉숭아 분꽃 할미꽃 흑종초(리켈라) 종이꽃 천일홍 지니아 프록스 멕시칸모자 멜란포디움, 백일홍 달리아 층꽃 코스모스…  

아마 도시에 살았다면 누릴 수 없는 기쁨이요 만질 수 없는 선물일 것이다. 물론 아내와 나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노력과 기대보다 더 좋은 것들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많이 받았기에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그럴 경우 감사는 산술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인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1년 받은 양의 크기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느끼는 여유와 편안함 그리고 건강함을 누리게 했던 보이지 않는 신의 은혜까지 포함한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는 것이다.

텃밭 농사 8년째. 배워야 할 것들은 아직 많다. 나이를 헤아리면 "벌써…!"라는 한숨이 가볍지 않다. 그러나 늙고 병드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추우면 불 때서 몸 덥히고, 더우면 그늘에서 쉬면서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자연의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가 짧은 고통 끝에 조용히 갈 수 있다면 큰 복이 아닐까?

홍매(紅梅)에 벌써 작은 꽃망울이 보인다.  귀촌에 뜻을 둔 분들은 겨울 땅을 찾아보시기를!  2013.12.16.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숙지원 #감사 #기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개인의 잔잔한 기록도 역사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봄 길 밝히는 등불, 수선화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