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자주학교 이재윤 교장은 "나는 한 달에 60만 원 벌지만, 600만 원 버는 사람보다 10배는 더 기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용
"한 달 운영비는 150만 원으로 다 돼요. 교사들 월급은 없어요. 물론 저도요. 오전에 하는 신문배달 보수로 한 달에 받는 60만 원 정도가 제 생활비의 전부죠. 복지단체에서 반찬을 받아 와야 하니까 자동차는 있어야 해요. 차량유지비하고, 월세 25만 원. 학생 1인당 월 10만 원 정도 비용이 들어요. 8년간 그렇게 운영이 돼서 그런지 구조적으로 적응이 됐어요."
기업이나 정부 후원을 받으면 형편이 조금 나아질 텐데 왜 받지 않을까?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활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해요. 이건 교대 학생들이라면 다 배우는 교과서적인 상식이죠. 그런데 현장에 나오는 교대생이 얼마나 되나요? 우리는 배운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할 뿐이에요."이재윤 교장은 그저 묵묵히 행동하려는 것뿐이라고 한다. 안양시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시민사회 단체회원들과 함께 거리 집회를 하기도 한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으면 이런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그런 것 때문에 정부의 후원을 거부했어요. 정부 후원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저희만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시민 소액 후원자 분들이 뒷받침해 주시는 구조가 좋은 것 같아요." 이미 월 150만 원으로 지난 8년을 버텨왔다. 앞으로도 운영비가 더 늘어나게 되면 저축하면 되고, 줄어들면 아끼면 된단다.
"돈이 들고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다만 우리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해주지 못하는 게 좀 안타깝죠. 당장 지하에서나 벗어나고 싶어요. 지하라서 환경이 썩 좋지 않아요. 교사와 학생 모두 금세 지치죠.""답답해요, 중요한 건 아이들 환경을 개선시키는 건데..."자주학교는 안양지역 풍물패 연습장 한 켠을 빌려 쓰고 있다. 풍물패 단원들의 협조를 얻어 월세로 들어가 있다. 초등학생들은 학교를 파한 뒤 오후 2시께 공부방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기자가 찾아간 시각은 금요일(12월 6일) 오전, 아직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부방 학생들의 가정 형편들은 어떤지 물어봤다.
"물론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이곳을 찾지 않아요. 다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지만 장애인 부모를 두었거나 학생 본인이 장애인인 경우는 아무래도 더 어려워요."자주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하나 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고, 어머니는 팔다리가 짧다. 이 학생네 식구들은 얼마 되지 않는 국가보조금을 받고 산다. 그런데 통장에 국가보조금 이외의 소득이 찍히면 보조금이 줄어든다고 한다. 소득 활동이 있으니 보조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그래서 자주학교에서는 연말에 얼마라도 이 학생에게 장학금 등 지원을 하려고 해도 못 준다고 한다. 그나마 쌀 같은 물품으로 대체해 전해줄 뿐이다.
"답답해요. 아무리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라도 요새 쌀이 없어서 굶어 죽겠어요? 중요한 건 아이들의 환경을 개선 시키는 것이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원을 보낸다거나 디지털기기 제공 등과 같은 시대에 맞는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현금 지원이 안 되니 그런 걸 해주기가 어려워요. 이러니 가난한 아이들의 환경이 대물림되는 것 아니겠어요?" 자주학교에는 이 학생뿐만 아니라 갖가지 환경에 처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들이 많다. 이재윤 교장은 이런 학생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집 해주겠다는 어머니를 거절한 아들이재윤 교장에게 누군가 자주학교를 맡아 관리하라고 강요한 건 아니다. 스스로 걸어들어와서 이 일을 하고 있다.
"한번은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왜 이렇게 사느냐'며 집을 하나 얻어주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결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요. 저는 말했어요. 차라리 돈을 달라고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랑 같이 사는 게 좋다고요. 평생 이렇게 살 것 같다고요(웃음)." 그 역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천에서 태어나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 때는 팝송을 좋아해 영문과 혹은 문예창작학과에 가고 싶었다고. 번역을 직업 삼아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기타를 튕기며 음악에 빠져 사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미국의 선교사에게서 학비를 후원받은 일과 장애인이었던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당시 받은 영향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성결대학교에 다니면서 안양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여느 또래들처럼 평범한 즐거움에 빠져 살던 청년이었다. 그는 입대 후 전경으로 차출돼 제주도에 갔는데 그때 이후 만화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때 제주도 강정 옆에서 해군기지를 짓고 있었어요. 저는 그 옆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섰고요. 어민들의 시위를 막기도 하고 그랬죠. 전역 후 하루는 한 선배가 테이프 하나를 들어보라며 줬어요. 처음에는 무슨 북한 노래 같았는데, 김광석·안치환·노찾사 노래였어요. 그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듯했어요."그렇다고 이후 그가 소위 '운동권 학생'으로 변모한 건 아니다. 그는 팝송이 더 좋았다. 그가 안산의 전자제품 부품 회사에 다닐 때 동료·선후배와 함께 제조업 하청업체를 차리며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의 배신으로 1억 원 가까운 돈을 날리고 접기도 했다고.
"가난에 가난이 반복... 모른 척할 수는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