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 간 맞출 때는 간장을 부어이 해"

[섬진강변 두계마을 이야기]마을 사람들과 호박죽을 쑤다

등록 2013.12.27 11:50수정 2013.12.2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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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정이 안 되어  집이고 마당이고 어수선한데도 누가 온다고 하면 반갑다. 사람 만나는 즐거움이 앞서는 것이다.  이번 늦가을에 세 차례 손님이 왔다. 한 번은 저녁, 한 번은 점심, 한 번은 식사가 아닌 차를 대접했다.


식사는 주위에 있는 푸성귀로 대접을 하게 되어 배추, 무, 배추, 무... 의 연속이다.  배추, 무로 전을 부치고, 배추, 무로 나물도 하고 생채도 하고, 배추 무로 담근 김치를 내고, 배추 무로 담근 싱건지도 내고, 날 배추를 내서 그냥도 먹고 쌈 싸먹고...

그런데 인사치레인지 모르지만 이런 푸성귀가 고기보다 좋다고 한다. 내가 거둔 토란으로 끓인 국도 좋다니 다행이었다. 토란을 끓인 후 들깨가루를 듬뿍 넣고 소금으로 간 맞추는 국은 두계마을에서 배운 것이다. 배추전은 알았지만 무전은 이 마을에서 처음 들어보았다. 배추나물이며 생채는 마을회관에서 곧잘 해먹는 덕에 친숙하게 되었다.

"우리집에 내일 손님이 와요."

내가 무심코 한 말에 다음날 아침이면 이장댁이 배추 싱건지도 가져다주고, 무 싱건지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손님에게 내라는 것이다.

식사는 밖에서 하고 잠시 들러 차만 마시겠다는 분들이 오기로 한 전날이 되었다. 오는 쪽에서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차만 마시겠다지만, 맞는 쪽에서는 달랑 차만 준비하게 되지는 않는다. 날도 짧은데 떠나기 전에 입다실 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궁리궁리하다가 호박죽을 준비해놓으면 좋을 듯 했다. 


그런데! 나이든 한국여자라면 누구나 쑬 줄 아는 호박죽을 나는 쑬 줄 모른다. 먹어는 봤지만 직접 쑤어본 적이 없다. 해마다 누런 호박이 한두 통 생겼어도 해먹을 줄 몰라 종내 상해버리곤 했다.

"호박죽을 어쩌고 해야 맛있게 쑤까요?"


나는 마을 회관에서 점심 먹으며 슬쩍 호박죽 쑤는 법을 물어봤다.

"호박을 껍질 벳기고 푹 삶아서 찹쌀 새알심 넣으면 돼. 팥도 좀 넣고. 근디 뭣허게?"
"내일 손님이 오는데 호박죽 허면 좋겄어서요."
"호박은 있는가?"
"없어요. 한 통 있었는데 열어 보니까 하나도 안 익어서 못 먹겠어요."

호박도 없으면서 호박죽 쑨다고 태평한 소리를 한 것이다. 

"요 전날 회관에서 호박전 해먹고 절반 남었는디 주까." 

계산댁이 고추장 봐주러 오면서 호박 반통을 가지고 와 쪼개서 껍질을 벗겨주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호박죽 쑤는 것이 아무리 해도 머리속에서 진도가 잘 안 나간다. 

a  호박을 갖다주고 껍질을 벗겨주기 까지..

호박을 갖다주고 껍질을 벗겨주기 까지.. ⓒ 김영희


"호박을 푹 삶아서 뭣을 넣는 것이 좋아요? 누구는 밀가루를 넣으라고 허든디."

회관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또 호박죽 타령을 했다.

"손님 대접할라먼 찹쌀가루를 넣어야제".
"찹쌀가루 덩글덩글 넣어. 씹히는 맛이 있어야해." 
"새알심도 좀 넣고 그러면 좋아."
"아 호박 이리가져와. 낼 아침에 혼자 쑤지 말고 여그서 놀면서 아조 써 가꼬 가."

한마디씩 하다가 답답한지 아예 호박을 가져오란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얼른 집으로 뛰어가서 호박을 가져왔다.

"그런데 찹쌀가루는 있어? "
"마른가루가 있어요"

내 대답을 듣던 부녀회장이 부르르 나가더니 금세 봉지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이것 내가 찹쌀가루 빻아서 냉동에 둔 것이여. 선물로 줄텡게 이것 넣어."

사양도 못하고 염치없이 받았지만 세상에 이런 선물이 또 있을까. 흰 찹쌀가루가 찹쌀가루가 아니라 희디희고 곱디고운 마음이다.

다른 때 같으면 저녁 먹고 나서는 다들 집으로 가는데 오늘은 부엌에 안쳐 놓은 호박 익기 기다리느라 밤이 늦도록 논다.

a  마을회관 부엌에서 끓는 호박

마을회관 부엌에서 끓는 호박 ⓒ 김영희


"내일 호박죽 간 맞출때는 간장을 부어이 해."
"아먼. 왜간장 절반 조선간장 절반 해야써."
"아이가. 저 사람 진짜로 간장 부을라고."
"두계마을에서는 호박죽에 간장부으라고 가르친다고 또 신문에 내불라요이."

모두들 떼굴떼굴 구르며 웃는다. 우리집 손님 몇 사람 오는 것에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아니 온 동네사람들이 같이 맞는 셈이다.
#귀촌 #섬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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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두계마을에서 텃밭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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