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보신각종 함부로 울렸다간... 사형?

[게릴라칼럼] 왕의 지배에 도전한 보신각 침입자들

등록 2013.12.31 15:18수정 2013.12.3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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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a  보신각. 서울지하철 종각역 옆에 있다.

보신각. 서울지하철 종각역 옆에 있다. ⓒ 김종성


매년 12월 31일 밤마다 제야의 타종 행사가 열리는 서울 종로 보신각(종각). 현대인들은 이곳을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곳을 바라보는 마음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주만물을 대표해서 시간을 지배하는 조선 주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 따르면, 왕은 우주 주재자인 신을 대리해서 모든 사물을 관장했다. 왕이 관장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국가가 종을 관장하고 시간을 공지한 것은 시간이 왕의 관할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지방의 종각은 이런 배경에서 세워졌다.


한양의 종각은 태조 이성계 때 세워졌다. 처음에는 지금 위치의 근처인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지금의 자리로 이동한 것은 제3대 태종 이방원 때였다. 한양 종각은 조선 후기인 광해군 때 2층 건물이 됐고, 고종 때 보신각으로 개칭됐다. 지금의 보신각은 1980년에 복원된 것이다.

한양 사람들의 일과는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마무리됐다. 왕의 책임 하에 국가는 밤 10시께 28회 종을 침으로써 통행을 금지하고 하루 생활의 끝을 공지했다. 새벽 4시께에는 33회 종을 침으로써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하루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한양의 경우, 서대문과 동대문의 직경은 대략 4~5km다. 이 정도 거리면, 보신각 종소리가 한양 시내 전체를 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출근하다 졸음운전을 하기도...

국가가 새벽부터 종을 울려댔기 때문에, 옛날에는 '아침형 인간'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일출 시각에 근무가 시작됐기 때문에, 새벽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벽에 식사하고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이런 풍경이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 임금의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심환지는 정조가 죽은 뒤 정조의 개혁을 송두리째 파괴한 보수파 거두였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을 때는 정조와의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다. 급사하기 3년 전인 정조 21년 5월 5일(음력) 즉 1797년 5월 30일(양력)이었다. 이 해에 정조는 46세이고 심환지는 68세였다.


이날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조는 "늘그막의 체력으로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기 어려울 터이니, 내일 비변사 회의 때 병을 핑계 대고 집에서 쉬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새벽에 출근하던 당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아침형 인간이었지만, 개인적 습관이나 갑작스런 사정으로 새벽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새벽 출근이 고역이었다. 저명한 학자이자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는 선조 임금의 승지(비서)인 민기문이 "새벽 종소리를 듣고 대궐로 출근하다가 말 위에서 졸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출근하다가 '졸음운전'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졸음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커브 길에서 졸음운전을 했다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지만, 이때는 '자동차(말)'에 자동센서가 있어 커브 길에서 '자동차'가 스스로 회전을 했다는 점이다.

보신각종 치는 일, 왕 권위와 직결되는 사안

a  강화유수부에 설치된 종각. 인천시 강화군에 있다.

강화유수부에 설치된 종각. 인천시 강화군에 있다. ⓒ 김종성


왕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일반 백성들은 새벽과 밤중에 들려오는 종소리를 통해 왕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대통령을 접촉하듯이 말이다. 종소리를 통해 왕과 백성들이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보신각종을 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이것은 왕의 권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핸드폰이나 벽시계 혹은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라면, 보신각종이 잘못 울린다 해도 일상생활에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새벽이나 밤중에 시각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신각종 타종은 정밀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함부로 보신각종을 울리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다. 일부러 보신각종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술김에 치는 사람도 있었다. 동기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런 불법 타종은 백성들의 생활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시간의 지배자인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보신각종 불법 타종자들은 흔히 징역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광해군 다음 임금인 인조 때 이야기다. 인조 17년 5월 3일자 즉 1639년 6월 3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정해진 시각이 아닌 때에 보신각종이 갑자기 울리는 바람에 병조(국방부) 직원들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범인을 잡아보니, 스님이었다. 스님을 병조에 데려가서 심문을 개시했다.

심문에 착수한 병조 직원은 훈방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성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들이 스님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정신이상자라는 판단 하에 병조는 훈방 조치를 내렸다.

보신각종을 발로 친 이세직, 그의 말로는...

정조 임금 때였다. 정조 7년 8월 2일자 즉 1783년 8월 29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충청도 양반인 윤광류가 해가 지기 전에 보신각에 침투해서 종을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밤 10시가 안 됐을 뿐만 아니라 해가 지지도 않은 시각에 보신각종이 울렸으니, 한양이 순간 발칵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병조 직원들이 윤광류를 체포해서 "왜 쳤습니까?"라고 묻자, 너무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윤광류는 "주상 전하께 참외를 바치고 싶었습니다"라며 횡설수설했다. 어쩌면 윤광류는 정조 임금의 개혁을 지지하는 '정빠'였는지도 모른다.

어전회의에서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은 윤광류에 대한 준엄한 처벌을 건의했다. 하지만, 정조는 "그냥 덮어두자"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주상 전하께 참외를 바치고 싶었다는 윤광류의 진술이 정조 임금의 판단에 조금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a  조선시대 지도에 표시된 병조 터(별표 오른쪽). 왼쪽 산 밑에 경복궁이 보인다. 병조에서는 보신각종 불법 타종자를 심문했다. 지금의 광화문광장이 표시된 이 지도는 영조 임금 때인 1750년대에 제작된 <경도오부·북한산부도(京都五部北漢山附圖)>라는 지도의 일부분이다.

조선시대 지도에 표시된 병조 터(별표 오른쪽). 왼쪽 산 밑에 경복궁이 보인다. 병조에서는 보신각종 불법 타종자를 심문했다. 지금의 광화문광장이 표시된 이 지도는 영조 임금 때인 1750년대에 제작된 <경도오부·북한산부도(京都五部北漢山附圖)>라는 지도의 일부분이다. ⓒ 김종성


장희빈의 시아버지이자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 임금 때 일이다. <현종실록>의 개정판인 <현종개수실록>의 현종 11년 9월 15일자 즉 1670년 10월 28일자 기록에 따르면, 보신각에 난입해서 발로 종을 울린 사람이 있었다. 보신각종을 발로 찼으니, 얼마나 세게 찼을 것이며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범인은 충청도 공주 사람인 이세직이었다.

병조 관리가 "왜 쳤나?"고 묻자, 이세직은 "송시열 대감의 집에 갔다가 마루 밑에 숨어서 송시열 대감의 역적모의를 들었습니다"라며 "역적모의를 고발하고자 종을 울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송시열은 보수세력이자 집권당인 서인당의 영수였다. 그런 송시열의 역적모의를 고발하고자 보신각종을 찼다고 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보신각종을 울린 부분보다도 송시열의 역적모의를 들었다는 부분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세직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얼마 안 있어 드러났다. 송시열의 집에는 마루가 없었다. 따라서 그 집 마루에서 역적모의를 들었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보신각종을 울린 죄도 무거운데 거물급 정치인을 무고하기까지 했으니, 이세직이 감당해야 할 형벌의 무게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송시열을 무고했을까?

이세직이 충청도에서 한양까지 가서 보신각종을 찬 것은 민사분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종을 울린 뒤에 하소연을 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종을 친 뒤에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감옥에 구속됐다.

이세직이 감옥에서 병조의 심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세직은 간수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간수는 "그런 시시한 일로 종을 칩니까?"라며 "기왕이면 역모를 고변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해야죠"라고 장난삼아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세직은 송시열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송시열의 역적모의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이세직은 평소 송시열을 비롯한 보수파가 싫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세직은 보신각종을 친 행위에 더해 송시열을 무고한 행위까지 추가되어 최고형인 사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형 집행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저절로 죽었다고 한다.

보신각종은 왕이 백성들의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위와 같이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종을 치고 시간 계산에 혼동을 주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은 시간의 지배자인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왕의 시간 지배와 그에 대한 짓궂은 반항의 역사가 담긴 곳이 바로 보신각이다.
#보신각 #제야의 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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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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