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엔진을 켜둘게'언제든 대자보를 써 들고 뛰쳐 나갈 수 있도록 항상 준비 중이다.
이정혁
처음 1~2년간은 선배들이 적어준 문구를 단순히 대자보 용지에 옮겨 적는 일을 했다. 글자 간격에 맞게 대자보 용지를 반듯이 접고, 강조할 단어들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 적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다 보니 아무렇게 갈겨 적어도 행과 열이 각을 잡았고, 대자보 한 장 적는 데 십여 분이면 충분해지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홍보와 선전의 거인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서부터는 학생회 선전과 홍보를 담당했는데, 그 당시 대자보에 적었던 내용들은 주로 정치 현안에 대한 학생회 의견이나 학원 자주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단순하게 옮겨적기만 하던 것이 문구의 내용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고민도 커지고, 스케일도 점점 커져 갔다.
흔히 전지라고 표현하는 대자보 용지 열여섯 장을 테이프로 이어 붙여 대형 걸개용 대자보를 만드는 신공을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큰 선전물은 책상 위에서 쓸 수가 없다. 학우들 대부분이 술집으로 향하는 저녁 7시부터 1층 현관에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적는다. 그때 몇 시간씩 시멘트 바닥을 엎드려 기어다닌 후유증일까? 요즘도 겨울이면 무릎이 시리다.
어느 날은 수업을 자체 휴강하고, 학생회실에서 대자보를 쓰고 있는데, 학장님이 들어오셔서는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누군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구먼... 글씨는 잘 쓰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홀연히 나가버리셨다. 차라리 혼을 내키시지, 침묵은 때론 비수보다 날카롭다. 그 날 이후로 학장님 수업만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대자보의 세계에도 일종의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초짜들의 경우는 주로 선배들이 건네주는 문구를 대자보 용지에 옮겨 적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한다. 선배가 되어감에 따라, 문구 작성과 대형 대자보의 구상 및 감독을 담당하고, 마지막 최고의 레벨이 되면 현수막을 만드는 고난이도의 기술을 연마한다.
플래카드용 천에 페인트로 글씨를 쓰는 일은 훨씬 고난도의 작업이다. 페인트와 시너(신나)의 비율을 적절히 조합해야 하고, 한 번 붓질 할 때 묻히는 페인트의 양 조절을 정확히 해야 글씨가 흘러내리지 않는다. 책상 두 개에 천을 못질해서 팽팽히 잡아당기는 일 또한 대단히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재주가 참 많은 애야, 신은 공평해..."누군가는 이런 오해를 하기도 한다. 시너와 페인트 냄새 자욱한 지하실 복도에서 담배 하나 꼬나물고 붓질을 하고 있노라면, 지나가는 여자 후배들에게 동경 혹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냐고. 찢어진 청바지에 군용 잠바를 입고 마치 위대한 예술가처럼 현수막 글씨를 쓰고 있는 남자 선배의 모습은 그 자체가 영화속의 주인공 아니던가?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지나가던 여자 선배들의 재잘거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재주가 참 많은 애야. 신은 참 공평해, 쟤가 얼굴까지 잘 생겼으면, 반할 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