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투쟁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1991년 봄은 참 뜨거웠습니다. 아니 대학가는 불타올랐습니다.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씨가 백골단이 휘드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어 4월 29일 전남대학교 박승희씨,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씨, 5월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씨가 몸을 불살랐습니다.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 김귀정씨가 백골단의 강제진압에 의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학생 두 명을 때려 죽여놓고도 노태우 정권은 반성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5월 25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당시 신학생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학생들을 맡아 가르쳤습니다. 당시 저는 부산 영도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예배때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내용이 어렴풋하게 기억납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다시 독재권력이 학생을 때려 죽였습니다. 학생들이 몸을 불살라 죽음에 이르는 것도 모자라 권력이 학생을 죽였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들의 죄를 벌하여 주십시오. 더 이상 학생들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이 나라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독재권력이 학생을 또 다시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권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도 터져나오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교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전도사가 기도 시간에 권력을 비판하고, 스스로 죽은 학생들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했으니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자살을 정죄하는 개신교 교리와도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당장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신자들이 "대학생이 저 정도 말을 할 수 있다"며 변호해줘 '해고'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신학교에 분향소를? 있을 수 없는 일!"그런데 더 큰 일은 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강경대씨 타살 직후, 학교에서 '분향소'가 설치됐습니다. 학교가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에 정치행위에 대해 굉장히 예민했습니다. 더구나 스스로를 불태운 학생을 추모하는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분향소를 설치한 학생들은 이른바 '운동권'이었습니다.
"죽음 사람을 위해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노태우 독재정권이 강경대 열사를 때려 죽였다. 그를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우리 학교는 신학교다. 신학교에서 어떻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이것은 제사가 아니다.""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이 제사가 아니면, 무엇이 제사인가.""독재정권이 죄 없는 학생을 때려 죽였는데.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어떻게 제사인가."하지만 분향소를 설치한 학생들을 소수였고, 반대하는 학생들은 다수였습니다. 힘의 논리에 밀려 분향소는 철거됐습니다. 이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반 학생들(신학생)과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말로 논쟁했습니다.
"분향소 철거는 폭력이다.""강제로 철거한 것은 성급했지만, 그래도 신학교에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릴 수 있느냐.""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노태우 정권이 학생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이를 가만두고 넘어갈 수 있나.""분향소 말고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분향소 논란이 조금 수그러들자 이번에는 '묵념'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때는 총학생회장을 봄에 선출했습니다. 후보자들 연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관위가 '묵념'을 하자고 했습니다.
"후보자들 연설 이전에 타살당한 강경대 열사와 분신한 학우들을 위해 묵념합시다.""야! 너희들은 사탄이야. 사탄. 어떻게 신성한 예배실에서 죽음 사람을 기리는 묵념을 할 수 있느냐. 기도로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죽은 사람을 위해 묵념하자고? 이는 우상숭배다!""이게 무슨 우상숭배냐.""묵념이 우상숭배지, 그럼 무엇이 우상숭배냐!"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다시 동무들과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은 예배실에서 묵념이 너무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 정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습니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그 생각에 동의는 하지 못해도, 존중했습니다. 2013년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물론 분향소와 묵념 사건으로 서로가 상처를 받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분향소와 묵념은 함께 못해도 대자보는 써보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분향소와 묵념은 함께 못해도 대자보로 우리 생각을 전달할 수 있지 않느냐.""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누가 쓸까? 네가 한 번 써라.""내가 무슨 글쓰는 실력이 있나.""네가 가장 적극적이 아이가. 특히 요즘 돌멩이도 들잖아.""거리에 나가지만, 돌은 안 던진다.""그럼 화염병?""돌도 안 던지는 무슨 화염병을.""그래도 네가 제격이다. 대자보 써라.""나는 글쓰는 실력이 안 된다니까. OO형이 어떻겠노.""OO형. 맞다 그 형이 글고 잘 쓰고, 생각도 노태우 정권이 비판적이다."'대자보'는 선동이 아닙니다... 열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