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빛나는 해를 보기 위해 새해 첫날 정동진에 간 건 아니었다. 일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 때 정동진엔 가질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영화 '태양의 제국' 포스터.
영화태양의제국
기억이란 바코드와 같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어느 날이 되거나 특정한 장소에 가면 갑자기 나타난다.
내겐 다들 해돋이로 가슴이 부푼 새해가 그렇다. 그날 해돋이 장소로 가장 유명한 정동진을 떠올리면 묵직한 기억이 솟아난다.
때는 2006년이었다. 12월 30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선배집에서 송년회를 거나하게 했다. 20명쯤 모인 큰 송년회였다.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그날 모임을 준비한 선배는 동네에서 막걸리를 두 통이나 받아와서 토하도록 마시게 만들었다. 그 많던 막걸리를 모두 다 마시고 새벽엔 와인과 맥주까지 나왔지만, 이미 모두들 미각과 판단력을 잃어 버린 상태. 그 상태로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아침을 맞이했다. 물론 나는 최후의 생존자그룹에 속해 있었다.
정동진행 기차, 솔로는 나 혼자네?원래 1월 1일 아침 정동진 해맞이공원에서 취재가 하나 잡혀 있었다. 어차피 기차를 타고 오고가며 쉬면 되니 송년회를 거나하게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12월 31일 늦은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잘못됐음이 드러났다. 머리는 아팠고, 속은 쓰렸고, 시간은 없었다. 여주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나가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모두들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일 때문에 서울로 나간다고 했다. 후다닥 머리와 얼굴에 물을 묻히고 따라나섰다.
서울까지는 잘 나왔으나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 풍경이라니. 아뿔싸. 선남선녀 청춘들이 너무나 많았다. 걸인과 같은 행색으로 혼자서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싣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당장 탈 수 있는 표는 이미 동이 나 4시간 넘게 기다려 5시 표를 샀다. 가까스로 표를 구했으나 입석. 게다가 가는 시간은 왜 그리 긴지. 6시간을 넘게 달려야 했다. 하루 전 신났던 송년회는 오글거리는 느낌으로 내내 속을 뒤틀었다.
어찌어찌해서 정동진에 도착했으나 지금까지 여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취재원은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정동진으로 오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아침 6시 30분. 6시간쯤 남았으니 여관에 들어가기도 애매했다. 2시간 정도를 배회하다 너무 추워 애초 계획 변경. 여관을 뒤졌으나 이미 빈자리는 없었다. 다시 원래 계획대로 바닷가를 배회했다. 밤은 또 왜 그리 긴지. 들리는 소문을 들으니 그날 정동진을 찾은 사람은 대략 30만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