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가 텅빈 건물...이거 아파트 맞어?

[한컷도시여행⑦] 초창기 아파트 박물관 서울 홍제동

등록 2014.02.15 12:34수정 2014.02.1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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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 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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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주택공사는 1968년 홍제동에 인왕아파트를 짓고 야심차게 신문광고를 실었다. 1969년 3월 1일자 경향신문 캡처. ⓒ 대한주택공사


2007년 어느 날 우연히 기사를 검색하다 한 대목에서 눈이 '딱' 하고 멈췄다.


"첫 코너로 서울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 이야기를 실었다. 1970년에 만들어진 남산의 제2시민아파트 이야기다. 그런데 자료 조사를 해보니 시민아파트보다 2년 더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다. 서울 홍제동의 인왕아파트. 대한주택공사가 1968년에 지은 아파트로, 1층에는 수퍼마켓과 세탁소가 있었다. 주상복합아파트인 셈이다."-세계일보(2007년 3월 15일)

우리 동네 이야기였다. 오래된 것,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많아 연륜이 있는 아파트를 찾아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 기사를 보기 전까지 우리 동네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이를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가까이 있어 소홀했다고 봐야겠다. 특별한 것은 가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동화 '파랑새'가 준 교훈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기사를 본 그날 걸어서 인왕아파트를 찾았다. 늦은 밤이어서 위치만 확인하고 주말에 다시 찾은 기억이 난다. 흑염소즙을 짜는 집과 보신탕집이 입구에 있는 게 특이했다. 입구에 이런 가게를 놔둘 아파트단지가 과연 서울 다른 지역에서 가능할까.

인왕아파트 건립은 당시 대한주택공사가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그 시절 서울시와 정부는 주거난 해결을 위해 아파트단지 건설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대한주택공사는 신문에 여러 차례 큰 광고를 게재하면서 인왕아파트를 홍보했다. 40년 세월을 건너온 건물을 바라보는 기분은 묘했다.

인왕아파트를 둘러본 이후 혹시 홍제동에 오래된 다른 아파트는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렇게 홍제동 초창기 아파트를 찾아나서는 여행에 나섰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한마디로 초창기 아파트 천국이었다.


아파트 평수가 6.4평인 1965년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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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는 1965년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홍제아파트다. 옥상엔 연기를 밖으로 빼내는 연통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 김대홍


홍제동엔 1984년 이전, 그러니까 지은 지 30년 이상 된 아파트가 10곳 이상이었다. 인왕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아파트도 찾아냈다. 1965년에 지은 홍제아파트가 주인공이었다. 이 또한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였다.


홍제동에서 발견한 초창기 아파트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단지수가 한 두 동에 불과한 소규모라는 점. 흔히 아파트라고 하면 빽빽하게 숲을 이룬 단지를 생각한다. 무리가 아니다. 실제 강남 아파트단지가 크게 인기를 끈 이후 아파트는 몇 백, 몇 천세대가 사는 대단지아파트가 대세를 이뤘다.

아파트가 도시이미지를 단순하게 만들고, 동네와 동네를 단절시키며, 집값을 높이는 주범이라는 비판은 맞다. 하지만 소규모 아파트단지는 그런 비판에서 비켜나야 마땅하다. 각기 다른 아파트 모양들은 오히려 다양한 주택구조를 만들었고, 동네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한 두동에 불과한 작은 단지아파트가 동네 집값을 들썩이긴 어렵다. 대단지가 대세가 된 1970년대 이후엔 시대 흐름에서 밀려나며 집값 경쟁에서 탈락했다 보는 게 맞다. 동대문아파트, 회현시민아파트, 안산맨션 등은 초창기 연예인들이 많이 산 고급아파트였지만, 1980년대 이후엔 서민아파트로 성격이 달라진다. 집값과 사회 관심에서 멀어진 덕분에 지금껏 살아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제동 초창기 아파트 유람은 흥미로웠다. 아파트마다 색깔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크기. 홍제동 아파트 가운데 맏형인 홍제아파트(1965년)는 크기가 21㎡(6.4평)에 불과하다. 그 시절 아파트는 넉넉한 집이라기보단 인구밀도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용에 가까웠다. 6.4평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방이 2개에 욕실이 1개다.

1970년 전후 만들어진 홍제동 아파트들은 10평대와 20평대로 방 크기가 넓어진다. 그런 아파트만 살아남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1979년 이후 아파트 3곳은 모두 20평대다. 점점 더 넓은 집에 살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특이한 집은 유진상가아파트로 불리는 유진맨숀(1970년). 34평, 44평대로 당시로선 상당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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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맨션은 건물이 두 동이다. 두 동 사이 옥상엔 놀이터가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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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맨션은 과거 연예인들이 많이 산 고급아파트였다. 60년대 문희, 윤정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린 남정임도 한때 살았다. 가운데 사다리꼴 공간을 둔 점이 특이하다. ⓒ 김대홍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한 점도 눈길을 끈다. 유진맨숀은 건물과 건물 사이 옥상에 놀이터를 만들었다. 안산맨션(1977년)은 충정아파트(1937년)처럼 사다리꼴로 건물을 배치하고 가운데를 비웠다. 건물 가운데로 빛이 들어오고 비가 내린다. 원일아파트(1979년)는 건물 가운데를 직사각형으로 비웠다. 빛과 비를 받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초창기 아파트들은 빛과 비를 막기보다는 끌어들이는 쪽이었다.

이들 아파트들은 유난히 꽃과 친한 게 특징이다. 거의 빠짐없이 복도와 담엔 화분이 놓여 있는데, 유진맨숀과 홍제맨션은 꽃밭이 특히 풍성했다.

집이 비좁아 복도에 짐을 잔뜩 놔둔 곳들이 많았는데, 유진맨숀에선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실내가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실내에 모두 수납하는 형태가 됐다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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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아파트는 가운데를 직사각형으로 비워 햇빛과 비를 받아들인다. ⓒ 김대홍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구조들에선 확실히 과거 흔적들이 느껴졌다. 홍제아파트 내부 계단에있는 철제유리창(4×3)은 오래된 학교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옥상에 나있는 연통은 잠수함에 달려 있는 잠망경을 닮았다.

소단지 아파트 여행에선 대단지 아파트에서 느끼기 힘든 재미를 맛봤다. 소단지와 대단지 아파트는 다르게 분류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그 때 했다.

아파트 변천사를 한눈에... '올레코스' 만들어 볼까

홍제동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시대별 아파트가 모두 공존하는 흔치 않은 동네다. 게다가 그 아파트들은 모두 소단지라 개성이 풍부하다. 현대주택으로서 아파트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귀한 지역이다.

문득 이들 아파트들을 순례하는 아파트 올레코스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민들 생활이 우선이다. 비어있는 집이 혹시 있다면 공공시설로 만들어 실내 구조를 엿보게 하고, 아파트 구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아파트생활사를 듣게 하면 어떨까. '오래된 아파트는 무조건 철거'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초창기 아파트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초창기 아파트는 '낡고' '더럽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물론 그런 곳들이 있다. 이미 40년이 지난 유진맨션을 살펴본다면 그런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40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놀랄 정도로 깨끗하다. 1990년대 말 안전진단을 받은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받은 바 있다.

홍제동엔 오래된 집들이 많다. 오래된 재래시장과 목욕탕도 있는 동네다. 더불어 아파트 역사를 온전히 품은 동네이기도 하다. 단순한 설명문이나 명패는 그 시절을 불러오지 못하지만 온전히 보존된 사물은 그 때를 불러온다. 오래전 그 때를 보고 싶으면 홍제동을 찾으면 된다. 30, 40년 된 작은 아파트 단지가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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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맨숀 꽃밭. ⓒ 김대홍


#홍제동 #아파트 #소단지아파트 #유진맨숀 #홍제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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