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고구마~ 사려! 야~끼~~모~~~"

겨울밤 으뜸 간식 '군고구마'의 추억

등록 2013.12.31 12:08수정 2013.12.3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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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단맛이 입맛을 당기는 군고구마 ⓒ 조종안


"군고구마~ 사려! 야~ 끼~~모~~~"


그 옛날 깊어가는 겨울밤, 거리의 군고구마 장수들이 외치고 다니던 소리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꺼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골목의 고요를 타고 안방까지 들려왔다. 달콤하고 따끈따끈한 군고구마가 눈앞에 그려지면서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던 그 소리. 어쩌다 신작로가 조용한 날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지기도 했다.

경력이 쌓인 군고구마 장수는 목소리도 유창했다. '군고구마~'는 고음으로 느리게 빼다가 마님이 머슴에게 명령하듯 '사려!'를 외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야'는 짧게, '끼'는 약간 길게, '모'는 고무줄 늘이듯 길게 뺐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황소 바람도 따뜻하게 녹여주었던 그 소리는 판소리 한 대목처럼 흥겹고 정겹게 느껴졌다. 귀에서 멀어지면 서운할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거리의 상가(商街)도, 이웃사촌 이름도, 생활 용어도, 어린이 교육 방식도 모두가 일본식이었던 1950~1960년대, 철부지였던 나는 '야끼모'를 '군고구마'의 멋진 다른 이름으로만 알았다. 군침만 삼키다가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맛보았던 당고(짬짬이)와 모찌(찹쌀떡)도 마찬가지.

"육지보다 섬 고구마가 더 달고 맛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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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화구이 오븐에 올려놓은 호박고구마 ⓒ 조종안


어렸을 때는 집에 고구마가 떨어지지 않았다. 고구마 캐는 시기가 되면 맛이나 보라며 선물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해마다 외가에서 가마니로 가져왔기 때문. 외가는 1960년대 초중반 간척공사로 육지가 된 섬(부안군 계화도)으로 외삼촌이 부리는 자그만 돛단배에 싣고 왔다. 째보선창에 배를 댔다고 연락이 오면 달려가 낑낑대며 고구마를 나르던 기억도 새롭다.


외가에서 가져오는 고구마는 모두 물고구마였다. 그 시절에는 전북 익산의 '황댕이고구마'(황등 고구마)를 최고로 쳤는데,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은 "육지보다 섬 고구마가 더 달고 맛있지!"라며 계화도 고구마를 선호했다. 황등 고구마(밤고구마)는 퍼석퍼석하고, 계화도 고구마는 수분이 많아서 입이 심심할 때 그냥 깎아 먹어도 '배추꼬랑이'처럼 달고 시원하다는 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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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합이 환상적인 김장김치와 군고구마 ⓒ 조종안


긴 겨울밤,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가 하나둘 모이면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가져온 물고구마와 김치를 쟁반에 가득 담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김치에 싸먹으며 털어놓는 제빙공장 기술자 고씨 아저씨의 익살은 방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빠지면 통행금지 사이렌 부는 소리가 들려야 깜짝 놀라면서 그때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조엄이 대마도에서 처음 들여왔다는 고구마는 호박고구마와 밤고구마, 물고구마로 나뉜다. 그 중 맛과 식감이 뛰어난 호박고구마는 품종 교접으로 10~20년 전부터 국내 재배를 시작했고, 밤고구마와 물고구마는 토종으로 분류된다. 토종도 햇고구마로 불리는 밤고구마는 여름에 나오기 시작했고, 가을에 수확하는 품종은 물고구마였다.

추억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군고구마

즐겁고 푸짐해야 할 2013년 성탄절과 송년은 그야말로 '개뿔'. 동짓날도 팥죽은커녕 긴긴밤을 혼자 지냈고, 크리스마스이브도 '나 홀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틀 모두 아내가 밤(나이트) 근무를 했기 때문이었다. 재수가 옴 붙었는지 주말인 그제도 어제(29일)도 혼자였다. 올해는 조카와 형제들이 모여 소주잔을 부딪치는 송년회 계획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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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불에 적당히 잘 익은 호박고구마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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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잘 익은 군고구마, 껍질과 속살이 떨어져 있다. ⓒ 조종안


밤이 되면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시골의 야경은 운치가 그만이다. 대문 앞에서 외롭게 졸고 있는 가로등 불빛이 한 몫 더한다. 금방이라도 야경꾼들의 딱딱이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 문득 이야기꽃 만발한 고향 집 안방 풍경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가 생각났다. 해서 호박고구마 몇 개를 씻어 직화구이 오븐에 올려놓았다.

가스불을 약하게 한다. 은근히 익혀야지 급하게 익히면 아까운 속살이 새카맣게 타버린 껍질에 달라붙고, 맛도 떨어지기 때문. 10분쯤 지나자 '찌이~찍 따닥' 소리를 내며 익는 냄새가 코를 즐겁게 한다. 고구마가 골고루 익을 수 있도록 뚜껑을 열고 하나씩 뒤집어준다. 20분쯤 지나면 완전히 익는데, 젓가락으로 찔러보면서 자잘한 놈부터 차례로 꺼내놓는다.

군고구마에는 동치미(물김치)가 좋다고 하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김장김치를 곁들이니 그 또한 궁합이 환상적이다. 맛도 맛이지만, 토속적인 정취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전환된다. 김치와 고구마는 서로에게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고 억제해주는 상부상조하는 사이여서 먹는 사람도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쪄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하고, 깎아 먹기도 하는 등 겨울철 으뜸 간식인 군고구마가 오늘은 추억여행의 동반자 역할까지 해줘 고맙기 그지없다. 저녁 지어먹은 아궁이 잿더미에 묻어놓고 깜빡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속상해했던 추억들이 아스라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순간 '겨울밤 친구는 역시 군고구마밖에 없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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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 모음, 주먹보다 큰 고구마는 잘라서 구웠다. ⓒ 조종안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군고구마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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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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