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빠도 인천의 송 변호사야?'라고 묻더라"

[2013년 인천사람들] 윤대기 '중국어선 불법조업 어민피해 공익소송단' 대표 변호사

등록 2013.12.31 19:03수정 2013.12.3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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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기(41)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 인천지방변호사회 상임이사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인천지부의 대변인을 겸하며 바쁜 한 해를 보냈다.


특히 중국어선 불법조업에 따른 서해5도 어민들의 대 정부 피해배상 공익소송인단 대표 변호사를 맡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난 자신의 의무라며 기꺼이 소송을 맡았다.

윤 변호사는 인천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났다. 윤 변호사가 나고 자란 마을은 파평 윤씨 집성촌으로 400년 이상 됐다. 지금도 시골마을 풍경을 간직한 곳으로 그의 부모는 농사를 짓고 있다.

어릴 때부터 법조인이 되는 게 자신의 길이라고 여겨 법대를 갔다. 윤 변호사는 "자기가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있는 게 법조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그래서 법대를 갔다"고 말했다.

그가 고려대학교 법대생이 됐던 1993년은 1991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였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그는 법학공부보다 사회현실에 먼저 눈을 떴다. 탈패와 풍물패 활동을 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3년간 대학생활을 열심히(웃음) 하다 보니 학사경고를 세 번 맞았다. 그러다 96년에 군에 입대했다. 군 제대 말년에 운동을 하다가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돼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거기서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대학시절 문화예술운동을 하면서 쌓인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재학시절에는 방송국 프로듀서가 되는 꿈을 키웠다. 부모가 기대했던 법조인과는 동떨어진 삶이지만 그게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함께 입원해있는 사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내가 사람을 돌보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군 전역 후 학교에 돌아와서 밀린 공부를 해야 했다. 복학해서 공부를 하던 중 후배들이 '민중열사 추모제' 연출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복학 첫 학기를 문예운동을 하며 보냈다.

그는 "부모님은 제가 8학기를 다닌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실제로는 9학기 등록금을 냈다"며 "그래도 마지막 두 학기는 장학금을 받았다. 학사경고 세 번에 장학금 두 번 받았는데, 한 학기를 남겨둔 2000년에 사법고시 1차 시험을 합격했다"고 말했다.

2004년 공무원노조 총파업 '파면·해임' 사건 맡아 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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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기 변호사 윤대기 ‘중국어선 불법조업 어민피해 공익소송단’ 대표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 인천지방변호사회 상임이사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천지부 대변인을 겸하고 있다. ⓒ 김갑봉


2001년 겨울 사법고시에 최종 합격했다. 그리고 2002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갔고, 2004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변호사보다는 판사와 검사에 무게를 뒀다. 사법연수원 성적은 판사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그러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포기할 정도로 맹장수술 부작용이 발생했다. 결국 시험은 1시간밖에 치르지 못했다.

윤 변호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잠시 방황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이게 변호사의 길로 가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사법연수원 졸업 후 서울 로펌에서 며칠 일하다 인천으로 왔다. 변호사로 치면 서울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인천에 터를 잡는 게 자기 삶의 몫이라고 여겼다.

2004년 인천에 둥지를 튼 윤 변호사에게 굵직한 사건이 찾아왔다. 2004년을 떠들썩하게 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총파업이었다. 윤 변호사는 총파업으로 파면 또는 해임된 남동구와 강화군 공무원들의 변호를 맡았다. 파면하고 해임한 게 부당하다는 취지의 변호였다.

그는 "소송은 1년 넘는 기간이 걸리기에 본안소송에 앞서 파면·해임이라는 행정처분에 대한 효력정지 신청을 냈다. 인천에서 최초로 기일이 잡혔는데, 법원에서 효력정지를 받아들였다.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라, 당시 결정문이 전국으로 퍼져 다른 지역에서도 효력정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이후 본안소송 1심에서 승소했고, 고등법원에서도 승소했다"고 말했다.

공무원노조 총파업 관련 파면·해임 공무원의 복직 소송을 승소로 이끌며 그의 이름을 인천에 알리긴 했지만, 개업한 지 1년 남짓한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이는 드물었다. 윤 변호사는 자신의 영업이 구치소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내복 대리점 사원이 밀어내기 압력에 시달려 덤핑 처리한 사건이 있었다. 회사에서 그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소했고, 제가 그 직원을 변호해줬다. 유죄가 인정되긴 했지만 형이 상당히 감량됐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구치소에서 인천지법 앞에 있는 윤대기 변호사가 변론을 잘한다고 입소문을 내줘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며 "그 사람 통해서 많은 민원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과는 지금도 가족끼리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중국어선 불법조업 공익소송으로 분주

윤 변호사는 2013년 시작과 더불어 인천지방변호사회에서 맡고 있던 임원직을 내려놓으려 했다. 민변 인천지부의 대변인 노릇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인천지방변호사회에는 400여 명이 속해 있다. 2013년 새 회장으로 취임하신 분이 같이 하자고 해서 다시 상임이사를 맡았다. 민변 인천지부는 2012년에 만들어졌다. 20여 명이 속해 있는데, 거기서 대변인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윤 변호사는 최근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을 맡기로 했다. 시대의 물음과 부름 앞에 나서야하는 게 어쩌면 변호사의 길로 접어든 그의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윤 변호사가 다시 공중파를 탄 계기가 있으니, 바로 중국어선 불법조업 대 정부 공익소송이다.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제안으로 공익소송단에 함께 했는데, 그도 서해5도에 들어가 눈으로 직접보기 전까지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이 그렇게 심각할 줄, 또 그에 비해 우리 정부의 단속은 미미할 줄 몰랐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6월에 연평도를 처음 들어갔다. 현장에 한 번 같이 가보자 해서 따라갔다. 처음에는 서울 변호사가 중심이었는데 인천에서 일어난 일이니 인천 변호사가 한 명이라도 결합해야한다고 해서 결합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도 2004년 소송에서 패소한 터라 현실적으로 안 되는 싸움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중국어선 80여 척이 우리 수역에 상주하면서 불법조업을 하고 있는데, 전혀 단속이 안 이뤄지는 상황을 봤다. 최선을 다해서 단속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방치하고 있으면 국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바꿨다"고 덧붙였다.

문제의 답은 역시 현장에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후 윤 변호사는 8월에 2차로 연평도를 방문했고, 10월에 3차로 백령도와 대청도를 방문했다. 2차 방문 이후 인천지방변호사회에 소속된 변호사들이 공익소송 변호인단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윤 변호사가 중국어선 불법조업 공익소송단의 대표 변호사를 맡아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면서 인천지방변호사회와 민변 인천지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3차 방문 때는 인천지방변호사회에서 활동비를 지원했고,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대거 함께 했다.

윤 변호사는 "지난 12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인천에서 전국 지방변호사회 회장단 모임이 열렸다. 그때 인천지방변호사회 회장님이 '인천에서 서해5도 중국어선 불법조업 공익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며'관심을 가져달라'고 했고, 상임이사 자격으로 브리핑을 했다. 그랬더니 각 지방변호사회 회장님이 '인천에서 정말로 좋은 일 하고 있다. 대한변협에서도 도울 일 있으면 돕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대청도에서 진행한 3차 간담회 때 수협회관이 어민들로 꽉 찬 풍경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대청면(=대청도와 소청도) 모든 어민들이 그날 하루 조업을 중단하고 간담회에 참석했다. 10여 년간 피해를 입었는데 누구 하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구나, 정말 절실한 문제구나, 하고 느꼈다. 꼭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같이 갔던 변호사들도 막상 피해의 심각성을 알고는 소송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어선 불법조업 공익소송단의 3차 서해5도 간담회는 소송에 들어가기 전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단속이 전보다 늘어 10월 '찾아가는 법정'차 연평도를 방문 했을 때는 단속이 잘 이뤄져 어민들도 꽃게를 제법 잡았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면사무소 직원이 '안전행정부에서 소송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계속 문의 전화가 온다'고 했다"며 "정부에서도 이번 공익소송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큰 아이가 아빠도 '인천의 송 변호사야'라고 묻는데..."

윤 변호사는 갑오년에도 인천지방변호사회 상임이사와 민변 인천지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바쁜 한해를 보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인천지방변호사회 상임이사로 있는 동안 변호사회 법률구조사업 예산 일부를 공익소송에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서해5도 중국어선 불법조업 공익소송에 인천지방변호사회의 역할을 끌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민변 인천지부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민변에서는 불통정국, 공안정국에 탄압받고 구속되는 인사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노동운동과 진보적인 사회단체에 대한 탄압에 대비하기 위해 법률적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데, 현실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있다. 법과 원칙에 기초해 상식과 논리가 통하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현 집권세력이 자기네들이 정한 룰을 따르지 않으면 불통을 해도 자랑스럽다고 얘기해, 많은 이들이 이념과 진영을 떠나 이 시대를 걱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끝으로 "큰 아이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지난 10년간 변호사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울었고, 반성하면서 울었다. 영화보고 나오는데 큰아이가 '아빠도 인천의 송 변호사야?'라고 물었다. '송변'처럼 살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올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부족하지만 변호인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당당히 서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인천 #윤대기 변호사 #중국어선 불법조업 #민변 인천지부 #서해5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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