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하늘과 호수와 초콜릿, 바릴로체는 스위스와 놀랍도록 닮았다.
김동주
정식 이름은 산 카를루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riloche). 파타고니아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작은 마을은 첫눈에도 여러 면에서 유럽 스위스를 닮아 있었다. 물감을 쏟아 놓은 듯한 하늘 아래 알프스의 품에 안긴 스위스와 안데스의 품에 안긴 바릴로체. 마을 너머로 크고 작은 호수가 하늘을 담고 그 호수 너머에 우뚝 선 산맥에 그림 같은 빙하가 솟아 있는 곳. 대자연의 품에 안긴 소박한 마을에서의 삶의 달콤함을 일깨워 주는 초콜릿까지.
의아할 정도로 많은 점이 스위스를 닮아 있지만,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부터 벗어난 후, 스위스와 독일 이민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집단 거주지인 콜로니(Colony)를 형성했다.
이후 남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휴양지 중에 하나로 발전한 바릴로체의 거리에는 아름다운 유럽풍 낮은 집들이 늘어서고 후수 밑 산기슭 곳곳에는 스위스 건축양식인 샬레(Chalets, 나무로 된 오두막집) 가 세워졌다. '산 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바릴로체'는 알프스 산맥에서 살다 온 스위스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니, 스위스의 쌍둥이 동생인 셈이다.
▲ 예쁘게 채색된 호스텔, Punto Sur와 4개월 만에 처음 누워보던 가정식 침대.
김동주
차가운 바람과 멀리 보이는 설산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따스한 바릴로체의 사람들은 마치 미래에 대한 큰 걱정이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오간다. 언제나 바쁜 여행객마저도 느긋하다. 고요하게 흐르는 나우엘우아피호(Laguna Nahuel Huapi)는 이곳을 찾은 모든 사람의 근심과 걱정을 집어삼켰다.
어렵게 찾아간 숙소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자들로 이미 만원이었지만, 마음씨 좋은 주인은 동양에서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며 비어 있는 아파트 방을 내어줬다. 어느 순간 여행자들이 걸기 시작했다는, 호스텔 벽을 가득 장식하던 각국의 국기는 아마도 그런 주인의 호의에 대한 보답이지 않았을까.
눈 덮인 프레이 산장의 하루토레스 델 파이네로부터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뒤, 준과 나는 한가지 다짐을 했다. 남미 여행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의 트레킹은 없다고. 여름이면 호숫가의 피서객, 겨울에는 설산의 스키어, 연중 계속 이어지는 트레킹을 위한 관광객들로 붐비는 바릴로체의 근교에는 그림처럼 솟아있는 산들이 많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웠던 우리는 케이블카라는 훌륭한 교통수단이 있는 세로 카테드랄(Cerro Cathedral)을 찾았다.
▲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듯 시작한 세로 카테드랄 트레킹의 입구.
김동주
그러나 남쪽 얼음의 대지와 달리, 겨울을 벗어난 지 오래인 바릴로체의 스키장은 모두 가게가 문을 닫은 채, 푸른 숲을 따라 이어진 트레킹 길로 우리를 반겼다. 우리가 했던 다짐과 프레이산장(Refugio Frey)이라고 적힌 팻말 사이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던 우리를 두고 버스는 어느새 떠나 버렸다. 팻말에 적힌 시간에 의하면 왕복 4시간. 시야에 들어온 배낭맨 여행자의 동상과 달리 우리는 배낭이 없다. 어쩐지 가벼운 기분이 들었던 우리는 유혹에 빠져 결국 그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평지나 다를 바 없던 나지막한 오솔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뻥 뚫린 왼쪽으로 들어오던 호수가 눈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으로 바뀌자 어쩐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우리는 산장으로 향할 것인가를 두고 몇 번이나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머릿속에 지난 2주간의 악몽이 떠오르고 숨이 차기 시작하자 뜻밖에도 몸은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갔다. 터질 듯한 심장은 팽팽하게 부풀었지만, 정상이 아니면 좀처럼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어느새 푸른 잎이 사라지고 다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는 또 하나의 내가 나타나 불꽃 튀는 말다툼을 벌였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도 이런 고생하고 있는 거야? 호숫가에서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며 산책하는 걸로는 안 되는 거야?
▲ 세로 카테드랄(Cerro Cathedral) 정상의 눈부신 풍경.
김동주
뜻밖에도 그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정상을 밟았다. 사람의 발이 닿는 최후의 땅에서 살아남았던 경험 앞에 카테드랄 봉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무릎을 꿇었다. 살얼음을 끼고 늘어선 발자국들을 보니 어쩐지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받아 눈은 더욱 빛을 발하고, 얼음을 스쳐 지나온 바람이 온몸 가득한 땀을 식힌다.
토레스 델 파이네보다 훨씬 친근한 모습을 간직한 검은 바위산 정상을 채우는 네그로 호수와 그 곁을 지키는 붉은 창문의 산장을 처음 봤을 때 참 엽서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다 비슷비슷한 풍경이라고 할 테지만, 압도감과 경외감, 놀라움과 신비감을 지나쳐 맞닥드린 그 풍경은 친숙함과 정겨움이 자리 잡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한다.
▲ 간단한 식사와 음료, 캠핑장을 제공하는 프레이 산장.
김동주
산장에 들려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캠핑을 할 건지 물어왔다. 잠시 들렀다 간다라고 하니 환한 웃음 사이로 어쩐지 쓸쓸함이 보인 듯했다. 이 산장의 주인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그 문을 두드려 주기까지 말이다. 시계를 확인한 우리는 포근한 분위기를 깨고 다시 눈밭으로 길을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마지막 트레킹일까?
간략여행정보 |
안데스 산맥 아래에 자리잡은 고요한 호수 마을 바릴로체. 파타고니아가 시작되는 북쪽 끝 지점에 위치해 겨울에도 견딜 만한 기온을 자랑하는 이곳은 여름이면 호숫가의 피서객, 겨울에는 스키어들로 붐빈다. 동쪽으로 16시간 거리에 있는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에서는 매일 출발하는 버스가 많으며, 국경너머 칠레에서 접근할 때에는 칠레 남부의 어촌, 푸에르트 몬트(Puerto Montt)에서 버스를 타고 닿을 수 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주 거리를 기준으로 여행객에게 필요한 모든 상점 및 기념품,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으며, 버스터미널에서 시내 혹은 시내에서 외곽의 스키장이나 호수로 갈 때는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남미를 통틀어서 가장 인기가 많은 휴양지 중에 하나로 성수기에 방문할 때는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교통편과 숙소의 예약은 필수다.
스키나 풍경을 보기 위한 근교의 관광지는 세로 카테드랄(Cerro Cathedral), 세로 캄파나리오(Cerro Campanario) 등이 있으며, 바릴로체의 보석인 여러 호수를 자전거로 둘러보는 바이크 트레일이 가장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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