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황희의 무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황희의 첫 번째 '선택 오류'는 1392년에 있었다.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고 노래하고,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조선왕조를 선전하던 그 시기에, 서른 살이 된 그는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이후의 행적을 통해 추론할 때, 황희의 선택은 정치적 신념에 기초한 결정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정치적 계산 없이 오로지 신념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이를 두고 '실패한 선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얼마 안 가서 선택을 수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신념이 아닌 정치적 계산에 의거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경기도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갔다. 이곳은 지금 북한 땅이다. 두문동에 들어간 충신들이 조선왕조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실화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려 멸망 직후의 황희는 조선을 거부하고 두문동에서 불출(不出)하는 쪽으로 인생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황희는 2년 만에 결정을 번복했다. 조선왕조 주체세력의 설득을 받아들여 신(新)왕조에 참여한 것이다. 이성계를 반대했지만, 2년 만에 이성계에 대한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조선왕조에서 승승장구한다. 이로써 그는 선택의 오류를 수정하고 만회했다.
얼마 안 있어, 황희는 또다시 선택 오류를 범한다. 신왕조에 참여한 직후에 황희는 세자 이방석 편에 선다. 이방석은 이방원의 이복동생이자 정적이었다. 황희는 세자 보좌관인 세자우정자가 되어 이방석을 보필했다. 이로써 황희는 본인의 의도 여하와 관계없이 이방원을 반대하는 편에 서게 된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이방석 편에 선 것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방원이 1398년에 쿠데타(제1차 왕자의 난)를 일으켜 이방석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때 황희는 36세였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가 한때나마 이방석을 보좌한 것은 선택 오류였다.
하지만 황희는 이방석의 정적인 이방원에 의해서도 중용됐다. 그는 태종 때 장관급인 판서의 지위에 오르며 태종의 신임을 받는다. 한때 이방원의 정적을 보좌했다는 '찜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정적인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행운아였다.
번번이 미래 예측에 실패했는데도 승승장구황희는 태종 말년에 또다시 선택 오류를 범한다. 세자 자리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양녕대군 편을 들었다. 훗날의 세종대왕인 충녕대군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의 선택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났다. 황희가 56세 때인 1418년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몰아내고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넘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