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콘의 '래디컬 스페이스'특정한 장소나 터전은 개인이 정치와 권력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양식이다. 저자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산출하는 국가 이외의 정치적 터전을 '급진 민주주의 공간'(래디컬 스페이스)이라고 명명했다.
이민희
광화문 광장의 경험이 실증하듯이 공간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정한 장소나 터전은 개인이 정치와 권력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양식이다. 현대 정치이론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공간과 정치와의 관계를 연구한 마거릿 콘의 <래디컬 스페이스>가 흥미를 끄는 이유다.
토론토대학 사회과학부 교수인 콘은 '협동조합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다가, 협동조합과 같은 특징적인 사회 공간에서 나타나는 정치에 매료되어 공간과 정치와의 관계에 몰두했다. 그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번성했던 저항의 장소들을 분석함으로써 민주주의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이 책 <래디컬 스페이스>에서 던진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장소가 정치에서 중요한가? 둘째, 특정 공간이 규율체제뿐만 아니라 변혁정 정치 프로젝트에도 기여할 수 있는가?
공유된 장소들은 그 목적이 하나로 통합된 데모스를 창출하는 것이든, 아니면 정치적 권리가 박탈된 자들을 세력화하는 것이든 건에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방식을 가능하게 하고 규정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특정한 장소들은 만남과 집회를 위한 대본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를 조율한다. 또한 조성된 환경은 그 환경에서 기대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규정해 줌으로써 개인들의 행동과 정체성을 형성한다. 공간은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사적 의미의 저장소'로서, 그리고 '기억을 회복시켜 주는 연상 장치'로서 상징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 (14~15쪽)콘은 "미시권력들을 식별해내기 위해 우리는 정치가 발생하는 다양한 장소들을 주시해야 한다"며 축제와 광장, 노동회의소, 상조회, 조합회관, 야간학교, 협동조합, 민중회관 등을 그 예로 제시했다.
역사적인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공간들은 제도화된 권력에 비해 거의 아무런 자원을 갖지 못했던 민중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고 정치적 결집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콘이 보기에 극도로 억압적인 통제와 규율의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공장은 쉽게 연대를 구축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대신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대화와 모임, 논쟁이 가능하고 사회적 인식의 인식의 통일성을 제고할 수 있는 새롭고 자율적인 정치적 터전이 필요했다.
이탈리아의 현실에서 노동자 결집의 중요 거점이었던 협동조합, 민중회관, 노동회의소는 회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운영되고 개방적, 대항 헤게모니적, 민주주의적 특징을 지니며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동원의 토대가 되었다. 18세기 말 유럽의 카페들이 '부르주아 공론장'을 대표하는 장소였듯이, 콘은 이러한 공간들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산출하는 국가 이외의 정치적 터전이라는 점에서 '급진 민주주의 공간'(래디컬 스페이스)이라고 명명했다.
사회정치적 공간으로써의 협동조합콘이 협동조합을 연구하다가 '장소와 정치와의 관계'로 주제를 심화시킨 데는 협동조합 자체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협동조합은 공동체를 인지하거나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공식 비공식 협력 과정을 창출했다. 협동조합은 정치적 맥락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의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협동조합은 그 어떤 작은 시골 읍내에서도 통상 가까운 친구나 가족보다는 큰 집단을 만나는, 그것도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최초의 사회적 공간이었다. 그러한 공간들은 직접적인 사적 유대를 넘어 공동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142쪽)실제로 19세기 잉글랜드의 로치데일(Rochdale)을 필두로 한 협동조합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중 조직이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안토니오 베르냐니니(Antonio Vergnanini)는 협동조합을 사회주의적 정치체의 축소판으로 규정하며 '협동조합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저항공간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콘은 실업과 불황, 농업 위기, 부동산 투기, 높은 세금,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 초기 이탈리아 자본주의가 안고 있었던 부정적 문제에 맞서는 적절한 전술로써 협동조합이 적합한 조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은 자본주의적 시장과 경합하는 가운데 대항 경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모순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극복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협동조합의 대가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라는 책에서 "협동조합만으로 모든 과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협동조합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한 가지 결정적 약점이 있다"며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자본을 조달해야 하나,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에는 상호연대와 경제활동 두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협동조합 고유의 속성을 놓치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경제에 대한 집단적 통제'라는 이상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소유한 협동조합 공장들 사이의 전국적 연합이 '코뮌주의'의 조직원리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협동조합 1백년사를 지나오면서 사회경제적 현실은 달라졌고 이 꿈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미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가 불확실성을 더 많이 생산해 낼수록 시장의 논리에 직접 예속되지 않는 여러 공간을 창출하고 가치와 의미의 자원들을 모색하고 집적하는 장소들을 확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267쪽)협동조합 '조직이론'이 필요하다지난해 협동조합기본법 통과 이후 한국에서도 협동조합 붐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협동조합의 혁신적인 사례들이 발굴되고 서울시의 사례처럼 민관 거버넌스 구축의 모범적인 예도 있지만, 협동조합기본법 통과 1년의 성적표는 '걸음마 단계'라고 위로하기엔 처참한 수준이다. 2013년 한 해 동안만 3천여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됐지만 제대로 활동하는 곳은 30% 미만에 그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진 셈이다. 구조는 협동조합이지만 내용은 일반 기업과 다를 바 없는 '짝퉁' 협동조합의 난립이 부른 결과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경제와 풀뿌리 민주주의 교집합으로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있는 성장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기업의 조직 모형과 경영 규칙을 협동조합에 그대로 이식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결국 협동조합은 정체성을 상실한 채 소멸할 것이다. 경제 조직이면서 동시에 사회 정치적 조직의 정체성을 가진 협동조합의 특성을 반영하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할만한 '조직이론'이 필요한 이유다.
래디컬 스페이스 - 협동조합 민중회관 노동회의소
마거릿 콘 지음, 장문석 옮김,
삼천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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