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강신주 박사의 노숙인 비하 발언은 최근 SNS 상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트위터 캡처
노숙인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강신주 박사의 언급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것은 충분히 치욕감을 느낄 만한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수치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노숙인들이 서울역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숙하는 것은 그들이 수치심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수치심이 있지만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한다는 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수치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는 예전에 파업 중인 건설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자신과 동료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설명하며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해 말했다. 공사장에 있는 노동자를 위한 시설(화장실, 식당 등)은 공사가 끝나면 모두 없애야 하기 때문에 사장은 최소한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수백 명이 일하는 건설현장에 화장실은 간이화장실 한 개뿐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은 오줌을 바지에 쌀 수도 없고 인근 건물에서 해결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사장 구석에서 노상방뇨를 했다.
어느 날 그분이 공사장 구석에서 노상방뇨를 하는데, 지나가던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어려서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어쩌다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노동자는 그때 느낀 치욕감을 나에게 말했다. 이 경우 노동자의 수치심은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게끔 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노숙인에게 적용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것은 충분히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노숙인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수치심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경우사실, 수치심을 주제로 하는 글을 쓰기 위해 언급할 만한 행동은 기차역에서 노숙하는 것 말고도 정말 많다. 위장전입을 한다거나, 논문을 표절한다거나, 뇌물을 받는다거나,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근거 없이 비방한다거나, 본인은 온갖 불법을 저질러 놓고 기자들 앞에서 "대한민국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거나, 이상한 금융회사를 세워서 선량한 사람들의 돈을 교묘하게 가로챈다거나, 본인이 살 사저를 아들 이름으로 등기한다거나, 하여간 찾아보면 정말 많을 것이다.
수치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이 충분했는데도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고위층, 권력자, 재력가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치심을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누군가를 언급해야 했다면 한국사회의 가장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그 밑의 층을, 그것도 힘들다면 두루뭉술하게 언급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강신주 박사가 언급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숙인이었다. 이들은 강신주 박사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못할 것이고 그의 글을 내리라고 신문사에 압력을 넣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강신주 박사가 한양대에서 한 강연을 기억한다. 그날 강연에서 그는 '인(仁)' 개념에 대해, 인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신주 박사는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한다고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난 노숙인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는 적어도 노숙인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