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은 힘이 세다

연극 <고수를 기다리며> 관람기

등록 2014.01.20 14:11수정 2014.01.2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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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수를 기다리며' 브로셔  연극 '고수를 기다리며' 브로셔

'고수를 기다리며' 브로셔 연극 '고수를 기다리며' 브로셔 ⓒ 네이버 이미지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남편도 자식도 앞세운 외로운 할머니들 세 분이 살고 있습니다. 손맛이 좋은 할머니가 음식을 해주면 나눠먹고 바느질 잘하는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입담이 좋은 할머니는 살아온 이야기를 수다로 풀고... 세 할머니는 자매처럼 오순도순 즐겁게 지냅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들은 언제나 '고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목을 패러디한 듯한 '고수를 기다리며'를 환경연합 회원 초청으로 구경했습니다. 초대권으로 보는 공연이라 별반 기대를 갖지 않고 보았는데, 연극을 보고 나서는 어찌나 좋은지 여기저기 공연 소문을 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공연 내내 폭소가 끊기질 않고 노래와 타악 연주, 일인 다역의 혼신어린 연기에 한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연극의 추세가 무대가 객석으로 확장되는 것인데, 관객들도 배우처럼 연극에 참여하게 하는 역동성이 이 연극에서도 두드러집니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역할을 주고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걸며 연극 무대로 동참시킵니다. 게다가 관객들에게 막걸리와 인절미까지 나눠주며 연극을 보는 내내 눈과 귀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오감이 다 즐겁게 만듭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지 않는 정체도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리는 현대인의 고독과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는 연극이라면, <고수를 기다리며>는 이 '고수'가 때론 북 고수가 되기도 하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고수'하겠다는 할머니들의 의지도 담겨 있어 허무하거나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신명나고 따뜻합니다.

할머니들만 사는 시골에 찾아오는 공중보건의나 우체부가 그녀들에게는 자식처럼 반갑고 고마운 손님들이자 고수입니다. 할머니들은 반가운 자식들을 대하는 양, 먹을 거리를 내오고 선물을 주고 환대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부가 '강제수용 통지서'를 들고 옵니다. 이 시골마을이 강 개조 공사로 인하여 (4대강 개발의 직유입니다.) 강제수용된다는 통지서인데, 할머니들은 "강에서 수영하란 소리여 ?"하고 희화해버리고 찢어버립니다.

드디어 용역들이 나타나서 싹 밀어버리는 철거에 들어가려 할 때, 할머니들은 "우선 밥이나 먹으라"며 동그랑땡을 부치고 떡메를 치고 식혜를 떠옵니다. 무시무시한 폭력과 공권력에도 어머니의 넉넉한 품으로 환대하는 할머니들... 그것이 바로 우리 어머니들,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지요. (이때 관객들은 용역반원의 역할을 맡아 덩달아 떡과 막걸리, 식혜를 얻어먹게 됩니다.)

처절하게 공권력에 부서지면서도 연대의 끈을 놓치 않는 할머니들, 웃음과 신명을 잃지 않는 할머니들... 연극은 내내 웃음을 안겨주지만 마음 속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연극 관람 내내 밀양의 할머니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들은 힘이 셉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힘이 셉니다.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 밀양의 할머니들에게 위로와 같은 이 연극을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과 어머니가 있으니까요.
#고수를 기다리며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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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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