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 대신 강철로 그린 그림이에요

조환 개인전 2월 9일까지 학고재 갤러리서 열려

등록 2014.01.20 16:09수정 2014.01.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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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환 I '무제' 철, 조명(LED) 325×732×338cm 2013

조환 I '무제' 철, 조명(LED) 325×732×338cm 2013 ⓒ 김형순


성균관대 예술학부교수로 한국화가인 조환(1958~)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서 2월 9일까지 열린다. 설치작품 20점, 서예작업 2점을 선보인다. 이 전시는 먹 대신 쇠나 강철로, 농담(濃淡) 대신 빛과 조명으로 전통화의 현대화를 꾀한다.

우선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조명 아래 대형설치물인 나룻배가 놓여있다. 작품 제목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인데 피안의 세계에서 극락정토로 갈 때 타는 배이다. 신선세계의 환영(幻影)을 보는 듯한 이 작품은 세속에서 이상향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같다.


이 배와 함께 전시장 벽과 바닥에 당나라 장욱(張旭)이 행초서로 쓴 '반야심경' 전문 260자가 적혀있다. 이 경구는 "속된 마음을 없애고 참된 길인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가자"는 의미다. 마음을 비워야 참 자유가 온다는 뜻인가. 이 최근 작품을 통해 이 작가의 예술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지만 지금부터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철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었다

a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30×254×14.5cm 2012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30×254×14.5cm 2012 ⓒ 김형순


조환 작가는 산수화나 사군자를 먹과 붓으로 그려오다 7년 전부터는 쇠와 강철로 빚어왔다. 이젠 아예 경기 양주시 냉동기 공장 한편에 작업실을 두고 망치와 전기절단기로 철판을 자르고 용접한다. 작가의 말로는 밑그림도 없이 바로 작업에 들어간단다. 작업에서 보다 예측하기 힘든 우연적인 요소를 살리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에게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하게 됐냐는 기자들 질문에 작가로서 재료의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고민하다 새로 찾은 게 바로 '철'이란다. 그리고 차가운 철은 부드러운 붓에 비해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접근하게 돼 추상적이 되고 함축미도 높아진단다.

붓이 아니라 쇠로 만든다는 건, 형식은 전통적이나 재료는 현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접근은 작품에 우리가 사는 시대정신을 입힌 셈이다. 철로 작업을 하면 재료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는 작업장에서 버린 자투리 철을 쓰기에 부담감은 적단다. 그리고 보니 동양화를 팝아트처럼 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다.


a  갤러리 학고재 전시장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조환 작가

갤러리 학고재 전시장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조환 작가 ⓒ 김형순


그런데 그가 이런 철 작업을 하게 된 건 '우연'만 아니라 '인연'이 있다. 그는 20대 대학을 다니다 그만 두고 잠시 방황할 때 1년간 청계천 세운상가 용접기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단다. 그때 그가 얼마나 버틸까 사람들 주목을 받았는데 경력기술자 못지않게 철을 잘 다뤄 동료들을 당황하게 했단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80년대 한국에서 전통화를 그리다 1990년대 뉴욕으로 건너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5년간 조소를 공부하게 됐는데 그때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사실 현대미술에선 주제보다 재료가 더 중요하다. 차별화된 재료선택이 한 작가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욕엔 재료만 배우는 미술학교도 있다.


a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76×108×6.5cm(왼쪽), 236×112×10cm(오른쪽) 2013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76×108×6.5cm(왼쪽), 236×112×10cm(오른쪽) 2013 ⓒ 김형순


미술이란 원래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그 원리지만, 기존의 맥없어 보이는 묵보다는 거침없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철로 그리는 게 관객에게 임팩트를 주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터프한 철이지만 빛과 조명을 주면 활기와 생명력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정지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게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는 것 같아 흥미롭다.

철을 용접하면서 중간중간에 접히고 끊어졌다 다시 연결되는 부분은 마치 우리가 살다 부딪치는 난제를 극복했을 때 맛보는 통쾌함도 떠올려 눈길이 많이 간다. 한편 현대미술에서 중시하는 장식미술의 요소도 가미돼 매력적이다.

이우환 작가는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문명을 상징하는 '철'을 '관계항(Relatum)'으로 엮어 자연과 문명의 조응을 보여줬다면, 조환 작가는 좀 다르게 자연의 소재인 먹을 문명의 소재인 철로 바꿔 관객의 통념과 상식을 깬 셈이다.

쇠도 먹이 될 수 있다

a  조환 I '황산곡 논서구(黃山谷 論書句)' 화선지, 먹 136×41cm 2013

조환 I '황산곡 논서구(黃山谷 論書句)' 화선지, 먹 136×41cm 2013 ⓒ 김형순


전시장 입구에는 중국 북송의 시인 '황산곡(黃山谷)'의 글을 상형문자로 표현한 서예작품이 걸려있다. 어떤 결기가 느껴진다. 동양미의 근간이 글씨와 그림의 경계를 넘는 서예정신에서 온 게 아니냐는 질문에 화답하듯 "서예를 모른다면 그를 무식한 작가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며 이에 대한 소신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그의 철학은 바로 추사의 예술혼을 계승한 것이리라. 그는 맑은 아침에 글씨를 쓰지 않으면 한국화가로서 빚을 지는 것 같다며 서도(書道)로 문인화의 전통을 날마다 실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경계 없는 예술'이라는 말이 요즘 많이 회자되나 그건 사실 대가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뼈있는 한 마디를 던진다.

a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56×131×78cm 2013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56×131×78cm 2013 ⓒ 김형순


조환 작가는 작업과정에서 쇠에도 열을 가해 망치질을 하면 먹처럼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도 있고, 흰 벽과 검은 쇠가 빛과 조명을 받으면 흑백의 대조미를 이루며 장소와 위치에 따라 그림자의 '농담'을 다양하게 생성시킬 수도 있고, 작품과 그 그림자가 실재와 환영처럼 뒤엉켜 뜻밖의 입체감을 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작가에게는 위에서 언급한 공간생성과정이나, 금속화임에도 수묵화처럼 시적 감흥과 마음에 여유를 주는 여백미가 전혀 손상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작품의 결과보다 더 소중하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현장에서 봐야 제격이다.

a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91×135×14cm 2013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191×135×14cm 2013 ⓒ 김형순


그리고 위 대나무는 딱딱한 쇠의 질감에도 주변에 잔잔한 바람을 일렁이게 하고 그 기세가 산뜻하고 경쾌하고 거침이 없다. 이런 작업은 조그만 잘못 다뤄도 풍취와 품격이 소멸되거나 훼손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작가의 솜씨가 여성의 손길처럼 섬세하고 치밀할 뿐만 아니라 휘날리는 필획이 멋스럽고 운치가 있다.

a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311×452×10cm 2013. 한국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소나무그림이 회화도 판화도 아닌 철판이라 참신하다. 소나무가 거칠면서 정교하고 움직임이 보이면서도 고요하다

조환 I '무제' 철, 폴리우레탄 311×452×10cm 2013. 한국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소나무그림이 회화도 판화도 아닌 철판이라 참신하다. 소나무가 거칠면서 정교하고 움직임이 보이면서도 고요하다 ⓒ 김형순


끝으로 김환기 등이 그랬듯이 한국작가라면 우리 그림의 원형이 찾아 이를 '현대화·세계화'하는 게 과제다. 조환 작가도 그의 일환으로 금속으로 동양화를 구현하려한 것이 아닌가. 이런 기획과 시도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이제 디지털정보시대를 맞아 앞으로 개인이 됐든 협업이 됐든 그의 작업을 '모바일아트'나 '미디어아트'와 연계시키는 노력이 하나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백남준이 'TV부처'를 통해 도무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동양사상과 서양의 하이테크를 결합시킨 것처럼 그런 도전과 실험정신도 요청된다.
덧붙이는 글 [작가블로그] chohwan.tistory.com [학고재갤러리] hakgojae.com/2009/index.html
[작가소개] hakgojae.com/attach/exhibition_release/1389510241.pdf
#조환 #철로 그린 한국화 #반야용선(般若龍船) #장욱(張旭) #황산곡(黃山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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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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