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복 입은 여성에게 말 걸었더니... "경찰입니다"

[소심하고 때늦은 밀양 방문기①] 가로막힌 산

등록 2014.01.21 18:22수정 2014.01.2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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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머리보다 몸에 더 오래 머뭅니다. 40대가 된 지금도 저는 경찰만 보면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일단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은 후, 뒤늦게 정신을 수습해서 제가 지금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물론 제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20대 초반에 저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가질 권리(세계인권선언 제19조 의사표현의 자유)'에 따라서 세상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가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20대 내내 경찰을 보면 가방 안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기억을 되짚었고 교문이나 지하도 앞에 경찰이 서있으면 멀리 돌아가곤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긴 시간동안 집회에는 가지 않는, 정치에는 무관심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경찰이 막아선 길에 다시 갈 기회는 없었습니다. 2013년 10월 밀양 방문 전까지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포스터 작년에 세계인권선언을 공부하면서 살아오는동안 인간으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많이 뺏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포스터작년에 세계인권선언을 공부하면서 살아오는동안 인간으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많이 뺏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국가인권위원회

2013년 10월, 저는 밀양에 갔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밀양에 갈 계획이었던 건 아닙니다. 평소 어린 아이들 때문에 외박이 어려웠던 제가 큰 맘 먹고 홀로 가는 휴가계획을 잡은 것입니다. 목적지는 부산이었습니다.

영화제 기간에 맞춰 휴가계획을 잡은 저는 영화와 바다에 맘껏 취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직장 푸른영상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밀양 상황을 알리며 촬영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애 최초의 '홀로 휴가'를 부산이 아닌 밀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밀양765kV송전탑 반대대책위 미디어팀'의 임시활동을 위해 저는 밀양으로 가는 희망버스를 탔습니다.

푸른영상에서 만든 영화들 제가 일하는 푸른영상은 늘 주류 카메라로부터 소외된 인권을 말하려는 곳입니다.
푸른영상에서 만든 영화들제가 일하는 푸른영상은 늘 주류 카메라로부터 소외된 인권을 말하려는 곳입니다.푸른영상

2013년 10월 5일 오전 1시께, 109번 송전탑 공사 현장과 가까운 모정마을회관에 내렸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오전 7시에 주민들과 함께 산을 올랐습니다. 운동부족을 실감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열심히 산을 오르다보니 산 중턱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경찰들은 하얀 밧줄 같은 걸로 울타리를 치고 한 두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공간만 남겨둔 후 사람들의 행색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결국 함께 걷던 할머니·할아버지들만 올라갔고 저는 남겨졌습니다. 주민들만 올라갈 수 있다면서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랑 같이 왔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경찰을 피해 오던 길을 되짚어왔고 한참만에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도곡마을회관   길을 잃은 제게 미디어팀 담당자는 산 말고 다른 풍경을 찍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도곡마을회관 길을 잃은 제게 미디어팀 담당자는 산 말고 다른 풍경을 찍어 보내라고 했습니다.류미례

위치를 알 수 있는 건물을 찍어 보내라고 해서 사진을 보내고 누군가가 저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저와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쇼핑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길래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 산 위에는 주민들 밖에 못 올라간대요. 산에 올라가시려고 여기 앉아계신 거예요?"


좀 더 젊어보이는 여성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근무중입니다. 경찰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10명 가까이 되는 사복 경찰들이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앉아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찰 몇 명이서 작전 중이라 주차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주민들의 차는 돌려보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다가 강릉에서 왔다는 독립영화감독의 차를 타고 평지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14년 희망버스를 맞아 작년 희망버스를 타고 만났던 밀양의 풍경, 사람들에 대한 글을 씁니다. 지금은 이때보다 더 상황이 악화된 것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담고자하는 밀양의 상황 또한 억울하고 마음 아픕니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그 때 찍었던 영상과 사진들을 올립니다. 밀양에 더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가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밀양 #다큐멘터리 #세계인권선언 #류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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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제작공동체 푸른영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 여성, 가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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