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겠습니다.기억을 해야할 주체는 우리가 아닐까. 위 사진은 방문객 쪽지함. 아래 사진은 그 쪽지들을 게재해 놓은 게시판.
이홍찬
역사의 피해자들이 안장된 묘역에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 인사가 '나는 너를 기억하겠다'였다. 역사가 일궈낸 가혹한 인지부조화, 순이삼촌이 겪던 정신의 부조화. 그 잔해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빨갱이로 몰아야 했던 유무형의 억압 속에서 그들은 이러한 참혹한 역사를 '기억해달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아주 조심스레, 그리고 너무나도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묘들을 둘러보며, 누구 하나 만나면 이야기라도 좀 들으려 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길에도 차들은 도로 위를 드문드문 지날 뿐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길에서 공사를 하는 사람들 외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학살제주4·3사건은 1949년 3월을 기점으로, <보고서>의 표현대로, '평정기'에 들어선다. 1949년 5월 10일 치러진 북제주군 재선거에서는, 전년에 갑구와 을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각각 97%, 9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민심이 국가의 강압에 따라 충분히 바뀐 것이다. 6월에는 무장대 총책으로 지목됐던 이덕구가 사살된다. 그리고 이미 두 달 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1949년 3월 창설. 군·경찰·민보단으로 구성된 토벌대, 사령관 유재흥 대령) 보도대장 이창정 소령은 "4월 21일 드디어 남로당 당수인 김용관을 사살했다. 이로써 소탕전은 완전히 종결되었다."라고 말했다.
이미 학살은 충분히 진행되었지만, 그리고 무장대도 잡을 만큼 잡았지만, 학살은 멈추지 않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다시 계엄령이 발동된다. 제주도 경찰들은 전해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과 요시찰인, 불순부자들을 중앙의 명령에 따라 매우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잡아 들인다.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 폐지된 일제의 악법, '예비검속'을 활용한 것이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속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원할하게 하게 위해 반일인사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예비검속을 활용했다.
좌익단체 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입산 경력이 전무한 사람도 예비검속의 대상자였다. '요시찰인' '불순분자'를 잡아들이는 예비검속으로 수 천명이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 약 3000여명(예비검속 전에 수감된 사람도 포함)이 수감됐고, 학살당했다. 대부분 배 위에서 총살된 후 바다에 수장되었다.
"수장된 시체들은 거의 못 찾았지요. 증거를 안 남기려고 그렇게 했던 건데, 증거가 쉽게 안 사라지는 법이요. 수 십 년이 지난 뒤에 대마도에서 시체가 떠오르곤 하니까. 거 때문에 대마도도 여러 번 갔지요. 육지에 묻은 시체도 아직 발굴이 못한 게 많아요." 김창후 소장의 말이다.
1950년 음력 7월 7석날(양력 8월 22일). 새벽 두시엔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새벽 다섯시엔 모슬포 절간고구마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 일제 탄약고가 있던 섯알오름 굴로 끌려가 학살된다. 모두 예비검속으로 붙잡힌 이들이었다. 1956년까지 두 군데에 시체들이 뒤엉켜 있었다. 오름 정상에는 물이 차 있었다고 한다. 시체들은 이미 누가 누군지 모르게 부패했고, 작은 뼈들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변색된 옷가지, 금니 등을 토대로 후손들은 조상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한림 출신 희생자들은 '만뱅디'라는 곳에 있는 공동 장지에 묻히고,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수감 희생자들은 안덕면 사계리에 공동장지를 마련한다. 후자를 일컬어 '백조일손지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이다. 묘를 가리켜서는 '백조일손지묘'라 한다. 1956년 묘들이 자리를 잡았고, 1959년에는 위령비도 건립된다.
5·16 쿠데타 세력의 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