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 묘. 직사각형 모양의 다른 무덤과 달리 석판이 팔각형 모양으로 하고 있다.
김종신
무덤 앞에는 석등과 석상이 서 있고 주위는 돌로 쌓은 담이 둘러싸고 있다. 하륜은 정도전을 벤치마킹했다. 힘없는 정치 유랑자 정도전이 자신의 머리를 믿고 힘을 구해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갔듯이, 이방원을 찾았다.
왕자 중에 가장 학식이 풍부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안군 방원! 두 야심가가 왕자와 대신이 아닌, 주군과 가신으로, 동지로 새로이 만났다. 그리고 이방원은 왕이 되고 하륜은 영의정에 올랐다.
하륜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이 돈 저화(楮貨)와 운하건설 주장이 그렇다.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라 믿었다.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 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바다로 통하지 않고 내지의 운하를 통해서 수송하려고 계획했다. 물론 이 개혁안은 조선 민중들이 종이 지폐를 외면했고 운하 건설에 큰 비용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다.
하륜은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군주의 의중을 잘 헤아리고 의지를 실천한 까닭에 험한 시대 영화롭게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하륜의 죽음에 태종은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멈추고 고기와 생선이 든 반찬을 7일 동안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도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 줄까?"중학생인 큰아들은 내게 묻는다.
"아니. 화장해서 그냥 산에 뿌려줘~"조선 시대 최고의 권력가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비단옷을 입고 맛난 고기 먹으며 주위에서 떠받들어 모셔도 죽으면 그뿐. 넓은 묘를 쓰고 아무리 왕이 슬퍼하고 위로한들 죽으면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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